제 3세계에 부는 사파티스타 열풍-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국제적 민중연대 가능성 제시
제 3세계에 부는 사파티스타 열풍-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국제적 민중연대 가능성 제시
  • 신기섭 / 한겨례 신문 경제부 기자
  • 승인 2001.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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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남부 소외된 땅 치아파스의 원주민 무장 반군인 사파티스타가 최근 전세계적으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파티스타는 지난 2월말부터 3월11일까지 멕시코 전국을 도는 평화행진을 벌이고 12일 수도인 멕시코시티에 ‘입성’한 데 이어 28일에는 연방의회에서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연설을 하는 등 정부에 대한 정치 공세를 펼쳤다.사파티스타의 이런 움직임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 언론에 크게 보도됐고, 사파티스타의 대변인격인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제2의 체 게바라’로 평가되면서 대중적인 스타로 부상할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왜 무장 봉기에 나섰고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는, 그들의 무장봉기 ‘거사일’에 함축되어 있다.

‘제2의 체게바라’ 마르코스

그들이 치아파스주의 주요 도시인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 등 5개 지역을 점령한 때는 1994년 1월1일 새벽이다. 이날은 바로 미국, 캐나다, 멕시코의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는 첫날이었다. 사파티스타는 북미자유무역협정을 멕시코 민중, 특히 농민을 노예화하는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인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다국적 자본이 민중 착취를 위한 이념이며 도구라고 그들은 보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파티스타는 민중, 특히 멕시코 원주민들의 자치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의 중단을 제시하고 있다.

사파티스타의 뿌리는 멀게는 16세기 스페인 점령군에 대항한 마야민족의 저항기까지, 가깝게는 1911년 멕시코의 혁명영웅인 에밀리아노 사파타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사파티스타라는 이름도 사파타의 투쟁을 잇는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뿌리라면 역시 1968년 학생대중운동 세력을 꼽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상당수의 좌파 학생들은 정부에 맞선 학생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농촌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 중의 한 곳이 멕시코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인 남부 치아파스이다. 이곳에서 학생운동세력은 민중 의식화에 나섰다.

사파티스타의 또 다른 바탕은 학생운동세력보다 조금 먼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가톨릭 세력이다. 사뮈엘 루이스(Samuel Ruiz) 주교가 이끄는 가톨릭 전도사들이 멕시코 원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억압 상황을 자각시키고 권리를 요구하도록 가르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두 운동을 축으로 한 원주민운동이 양상을 조금 달리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 사파티스타라는 일단의 무리가 지주들이 고용한 사병들의 폭력에 맞서 농민을 지키는 민병대 형태로 등장하면서부터다. 특히 88년 선거 부정에 대한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사파티스타는 본격적인 지역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무장봉기의 방아쇠 구실을 한 것은, 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라 멕시코 정부가 옥수수 경작 농민에 대한 보조금을 폐지하고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하도록 규정한 헌법 27조를 개정해 토지개혁을 중단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치아파스 농민들의 불만은 분노로 돌변했다.

사파티스타의 무장봉기 직후 발발한 정부군과 사파티스타의 전투는 12일만에 휴전 상태로 들어가고 두쪽은 협상에 들어가 24개 조항의 잠정 합의안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살리나스에 이어 대통령이 된 에르네스토 세디요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중단할 생각도, 합의안을 이행할 의지도 없었다. 그렇다고 사파티스타를 완전히 진압하는 대규모 군사작전도 벌일 처지가 못됐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중단과 원주민의 자치를 요구하는 사파티스타의 목소리가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 퍼졌고, 북미와 유럽에서 지원세력들이 속속 등장해 국제적인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국제여론을 등에 업은 사파티스타는 96년 신자유주의에 대한 국제회의를 제안했고 7월 말에 전세계 43개국 3천여 명이 참석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와 인류를 위한 제1차 대륙간회의’가 멕시코 남부 밀림에서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리 속에는 당시 프랑스 현직 대통령인 미테랑의 부인 다니엘도 있었다.

‘무력’대신 ‘말’로 싸운다

그 이후에도 멕시코 정부의 태도는 변하지 않다가, 지난해 12월 비센테 폭스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대화의 가능성이 열렸고, 이런 상황 변화를 이용해 사파티스타는 평화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전세계 수많은 지역에서 무장 반군들이 일어났지만 사파티스타만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반군은 없다.

‘사파티스타만큼 이런 ‘대성공’을 거둔 이유는 몇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이들은 인터넷을 이용해 선전, 선동활동을 능숙하게 펼치고 있다. 사파티스타는 멕시코의 좌파 신문 ‘라 호르나다’와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이나 성명 등을 이 신문을 통해 발표한다. 이 신문은 이를 지면에 보도하는 동시에 인터넷에 올린다. 그러면 즉시 전세계의 지지단체들이 영어 등으로 번역해 다시 유통시킴으로써 사타피스타의 주장이나 활동은 즉각적으로 전세계에 알려지고 있다.

두번째 특징은 이들이 무력보다는 말로 싸운다는 점이다. 사파티스타의 대변인격인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철학적이고 시적인 글로 전세계의 상당수 좌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동구권 붕괴 이후 이념적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자율과 연대를 강조하는 그의 글들에서 상당수의 좌파들은 자신들의 이념적 전망을 찾고 있다.

하지만 서구의 사파티스타 지지 세력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캐나다의 여성 학자 주디스 애들러 헬먼(Judith Adler Hellman)은 좌파 연간지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2000년호에 실린 ‘실제와 가상의 치아파스’라는 논문을 통해 사파티스타 지지 세력들의 상당수가 치아파스를 ‘낭만적인 혁명지’쯤으로 여긴다고 비판했다. 치아파스 현실은 아주 복잡하고 문제 해법 또한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헬먼의 진단이다.

사파티스타는 신자유주의가 제3세계에 새로운 제국주의의 모습을 띄고 있다는 점을 극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 자금지원을 겪은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원주민 자치의 중요성과 국제적인 민중의 연대에 대한 강조는 무차별적인 국제화를 겪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사파티스타 무장봉기가 최근 언론들의 보도태도에서 드러나듯이 주장은 감춰지고 이미지만 부각된다면, 사파티스타는 ‘20세기말의 체 게바라’처럼 ‘낭만적 혁명 문화상품’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