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 가정에 대한 부당한 강요
호주제, 가정에 대한 부당한 강요
  • 박종훈 기자
  • 승인 2003.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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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정통가족제도수호 범국민연합’은 현재 여성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호주제 폐지 움직임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가지고, 23일에는 호주제 폐지 반대 삭발식과 1천만명 서명운동 발대식을 가지기도 했다.

한편, 여성 연합에서는 오늘의 호주제 폐지를 위한 법조인 선언을 시작으로 문화예술인, 각계 지도자, 1만인 남성 선언식을 가질 예정이다. 그리고 5월 중 호주제 폐지 입안을 목표로 한 구체적 활동도 진행 중이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는 지난 27일 ‘호주제 폐지 272’를 발족했다. 이 단체는 국회의원 272명에게 호주제 폐지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같은 날 국회에서는 민주당 이미경 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 50명의 발의로 호적제도 관련 민법 개정안이 제출됐다. 여성부의 호주제 폐지 움직임이 힘을 얻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렇게 대립되는 두 모습은 ‘호주제 폐지’의 문제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어보게 한다.

호주제를 바라보는 상반된 두 입장

그 동안 호주제 폐지를 반대해온 주장의 주된 근거는 호주제 폐지가 가족제의 붕괴와 그로 인한 사회의 혼란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호주제가 우리나라만이 가진 고유한 미풍양속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주로 제기해온 측은 유림계이다. 이들은 현재 우리나라의 높은 이혼율과 낮은 출산율을 근거로 ‘가정의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만약 호주제가 폐지된다면 가족 제도의 붕괴를 걱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가진 가정의 고유한 모습도 하나의 가치로 볼 수 있는데, 호주제를 거부한다는 것은 이전에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족제도의 형태에 무조건적으로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한다.

하지만 호주제 폐지를 추진 중인 여성부를 중심으로 한 단체들의 입장은 다르다. 기존의 아버지-아들-손자의 순서로 이른바 법률 상의 ‘호주’ 승계 순서를 명시하여 둔 호주제의 철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호주제가 그 바탕에 깔린 가부장적 가정관을 지지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 현재의 호주제를 따를 경우 한 가정의 자녀는 모두 아버지의 호적에 입적해야 하며 아버지의 성씨만을 따라야 한다. 또한 가정에서의 실질적 위치와 관계없이 성별의 구분으로 ‘호주’가 법적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가정의 모습을 법률로 규정하는 호주제로 인한 피해자가 늘어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예를 들면, 여성이 전 남편의 자녀를 데리고 재혼한 경우 자녀들의 성을 바꿀 수 없도록 하는 호주제의 규정 때문에 한 가정 내에서 아버지와 자녀가 성씨가 다른 채로 지낼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자녀들의 사망신고를 한 다음 출생신고를 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호주제의 법정 정당성과 실효성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호주제가 가족의 종적 관계와 부계우선주의를 강요하는 데 대하여 양성평등과 행복추구권과 관련하여 위헌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특히, 남녀의 불평등한 사회 현실을 더욱 강화시키기 때문에 사회 통합이라는 면에서도 호주제의 실효성이 없다는 점 또한 지적되고 있다.

호주제 폐지 움직임은 이제 힘을 얻어가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는 호주제가 법으로서 갖는 기본 이념과 철학이 남녀에 불평등한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된 까닭이 크다. 그리고 오늘날 호주제가 변화하고 있는 사회에 맞지 않아 일반 국민들에게 부당한 피해를 강요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더욱이 호주제가 우리 나라가 가진 고유한 미풍양속을 지탱하고 있는 법적 장치라는 목소리는 호주제가 일제 시대의 잔재라는 설명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일본의 경우 전쟁 후 호주제를 폐지하여 부모와 미혼 자녀를 기본으로 하는 호적제도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호주제 폐지가 가시화되면서 이를 대체할 가족 제도의 모색도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는 부부와 미혼 자녀 2대로 구성된 가족관계를 기본 가족부에 기록하는 방식이 검토되고 있다. 이때, 가족부에 기준인을 두게 되는데 기준인은 부부간의 합의를 통해 결정되어 기존의 호주제가 호주승계를 정해두었던 것과 차이를 보인다. 다른 방안은 현재 미국, 서구 유럽 등에서 시행되고 있는 1인 1적 편제방식이다. 이는 한명의 개인이 하나의 신분등록표를 받는 것으로 여기에는 간단한 가족관계만이 기록된다. 마지막으로 호적제도를 주민등록제도와 통합하는 방안도 제기되고 있다. 이 방안의 경우 개인 신상정보가 편리해지고 기존의 호주제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개인정보의 침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호주제 폐지 이면에 담긴 문제들

최근 여성부는 호주제 폐지기획단에 유림의 참여를 제안했다. 호주제 폐지 이후 가족 제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유림들의 목소리를 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새로운 가족 제도를 모색하는 데 국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이지만, 벌써부터 유림들의 참여거부로 난항을 겪고 있다. 유림들이 기존 호주제도의 일부 수정ㆍ보완이라면 모르지만, 호주제 자체를 폐지하는 데엔 강한 반대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실상 호주제 폐지의 가장 큰 걸림돌은 행정절차나 가족관계관리의 어려움과 같은 문제보다는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상당수 국민들의 정서이다. 호주제를 바라보는 많은 국민들의 시각에 편차가 워낙에 큰데다 많은 수의 국민들이 기존 호주제의 문제점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의 기본적 권리 보장과 이를 통한 양성평등을 이루는 것은 건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리고 여성계와 인권단체들이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호주제 폐지를 줄기차게 전개해 온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타난 유림들과 일반 국민들의 호주제 폐지 운동에 대한 반대 감정에서 보여지듯 우리 사회의 양성 불평등 문제는 사실 눈으로 드러나는 제도적 모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남녀 역할에 대한 가치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호주제가 폐지된다고 해서 가부장적인 가족제도와 같은 그 동안의 문제점들이 곧장 고쳐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호주제는 사회의 변화에 따르지 못해 양성불평등적인 가정을 조장하는 등 개인의 권리를 훼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게다가 사회통합과 가정 보호를 위한 사회적 환경을 마련하지 않은 채 법률로서 가정의 형태를 강제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에 따른 가족제도를 새롭게 모색하고 발전적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첫번째 발판으로서 호주제 폐지는 그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