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과학, 따뜻한 기술
겸손한 과학, 따뜻한 기술
  • 장수영 / 산경 교수
  • 승인 2018.03.28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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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은 인류가 처한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게 해주었다. 이 사실을 묘사할 때, 우리는 ‘싸움’, ‘정복’ 등의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들은 기아와 질병 같은 역경들과 인간이 싸워 승리했다는 표현인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 표현은 조금 어색하다.


싸움엔 서로 의지를 거스르는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과학기술의 경우 그 과학기술이 적용되는 대상은 ‘자연(自然)’이고, 그 자연은 문자 그대로 그냥 거기에, 자기(自)의 원리에 따라 그렇게(然) 있는 것이지 어떤 의지를 갖추고 인간과 싸움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과학기술과 그 과학기술이 적용되는 자연 간에는 어떤 대립도 싸움도 없다. 특정 물질에 생명체는 이렇게 저렇게 반응할 뿐이고, 힘을 가하면 물질은 이렇게 저렇게 변형될 뿐이지, 그 생명체나 물질이 자신의 의지를 고집하거나 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과학기술을 소유한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그 과학기술의 사용을 제한할 수는 있다. 이 경우, 그 과학기술을 가진 자는 못 가진 자가 그 과학기술을 사용할 것인지 말지를 결정할 권리, 곧 힘을 갖게 된다. 이런 경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있을 수 있는 의지의 충돌이나 대립을 싸움이라 부를 수 있겠고,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에게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때, 특정 과학기술을 가진 자가 보유하게 될 힘의 크기는 그 과학기술이 다다른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 힘의 크기는 증대될 것이며, 그 발전의 정점에서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절대적 힘을 갖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이 지점을 C S 루이스는 ‘인간 폐지’의 지점이라 부른다.


인간성의 가장 소중한 요체라 할 수 있는 ‘자유(自由)’는 ‘스스로(自) 말미암음(由)’을 의미한다. 반면에, 설명 가능한 자신(自)의 원리에 따라 그렇게(然) 되는 것은 자연의 영역이다. 결국, 인간성이 과학기술을 통해 그렇게(然) 설명되는 부분만큼 인간성은 자연의 영역에 귀속된다. 만일, 인간이 과학기술을 탐구하는 것이 자연을 적으로 벌이고 있는 싸움이라면, 과학기술의 승리가 있는 곳마다, 과학기술로 설명된 만큼, 적의 영역이 넓어지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규명되는 과학기술의 궁극적 승리 시점에서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인간은 완전히 자연의 영역에 흡수돼 ‘폐지’ 되리라는 것이 루이스의 논점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 만물의 존재 원리가 과학적으로 설명돼 모든 것이 스스로(自) 그렇게(然) 존재하여, 투명하게 드러난 세상에 인간은 없다. 설명돼 버린(Explained away) 인간성의 부분에 의지는 없다. 사랑과 증오도 슬픔과 기쁨도 투명하게 설명돼 드러나 아무것도 가려진 것이 없는 세상에 ‘인간성’은 없다. 결국, 우리가 보려는 모든 것이 투명해진 세상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세상이다.


물론, 인류의 역사 속에서 과학이 이뤄 낸 가장 큰 기여가 ‘가려진 것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지키려는 음모나 단순한 무지로 가려진 진실과 허망하게 만들어진 신화들은 과학의 환히 비추는 빛 앞에 밝게 드러나고 폭로됐다. 이런 일이 일어나던 지점들을 우리는 과학의 혁명으로 또는 인류 발전의 전환점들로 돌아본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숨겨진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은 그 무언가를 보기 위함인데, 그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아직 가려진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무언가가 보인다는 것은 ‘불투명한 무엇인가’를 통과하지 못하고 반사된 빛이 내 눈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언가 아직 가려진 것이 있어야, 그 감춤과 드러남의 ‘경계’에서 우리는 그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과학기술의 빛을 비춰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일은 여전히 고귀한 일이다. 하지만, 지나친 확신으로 “인간과 만물은 이러이러한 것일 뿐이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겸손히 떨어져 바라보는 만물과 인간의 모습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신비를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이감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는 겸손한 과학기술인들이 됐으면 좋겠다.


또한, 과학기술로 성취되는 힘은 그 힘을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행사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찾아 알게 된 과학기술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널리 공유하려는 노력에 힘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자칫 그 힘으로부터 소외돼 더욱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생기지는 않을까 생각하는 따뜻한 과학기술자들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