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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정보사회에서 법과 과학기술의 만남
[392호] 2018년 01월 01일 (월) 정채연 / 인문 대우조교수 .
법과 과학기술은 일견 적지 않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근대화라는 역사적 국면을 바라볼 때, 사회의 세속화 및 지식의 근대화에 터 잡은 합리적인 근대법과 근대과학의 성장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근대화의 역사에서 ‘합리화’는 전근대 사회와 같이 신비롭고 초월적인 힘에 의존해 불확실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통해 자연과 사회를 계산하고 예견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법과 근대과학은 모두 합리성 및 이성성에 바탕을 두고, 계산가능성과 예측가능성이라는 공통된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근대사회의 태동에서부터 법과 과학은 밀접한 역사적 상관성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지만, 법과 과학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전환적 시점은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생명과학기술에 대한 적절한 법적 테두리의 마련이 요청되었던 2000년대 초반이었을 수 있다. 이때 인류사회에서 과학기술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고 생명공학 연구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받고자 했던 ‘과학주의’와 인간의 존엄성(혹은 신성성)의 가치를 옹호하고 생명공학의 발전에 족쇄를 채우고자 했던 ‘윤리주의’의 첨예한 이념적 갈등 양상이 펼쳐졌고, 이에 대해 법과 정책은 적절한 규범적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 시기에는 법규범과 과학기술이 상호적이라기보다는 대결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것으로 이해됐고, 특히 황우석 사태라는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과학에 대한 윤리주의적 규범화가 정당화될 수 있었던 정치적 지형이 만들어졌다.  
십수 년이 흐른 지금, 법학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과학기술의 의의와 중요성이 주목되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2016년 초,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적인 바둑 대국 이후, 인공지능 및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높은 사회적 관심에 부응하듯, 2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법학에서도 관련 학술논문과 동향보고서들이 상당히 축적됐고, ‘한국인공지능법학회’가 새로이 창설되는 등 그 어느 학문 분과보다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생명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생명윤리 등 법규범적 쟁점들에 대한 논쟁이 촉발됐던 양상과는 성질상 구별되는, 법학에서의 더욱 근본적인 패러다임 변화 논의와 맞닿아 있다. 곧, 최근까지 전개돼 온 지능정보기술 관련 법담론의 동향을 살펴보면, 이들 논의는 지능정보사회의 도래가 기존 근대 법체계의 토대에서부터 법 패러다임 차원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임을 다루고 있으며, 이때의 법적 쟁점들은 몇 가지 지평으로 정리될 수 있다.
먼저 법철학과 같은 기초법학에서의 논의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근대법의 본질적인 속성 및 근대적 인간관 등 법의 모더니티 이해에 대한 근본적인 재구성·재해석이 이루어지게 되는 맥락을 다룬다. 특히 인공지능 법 담론은 지능정보사회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가치 및 현상을 어떻게 법적으로 수용할 것인지를 주된 쟁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휴먼 법 담론과도 접점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인간 중심적인 법체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구상하면서, 지능로봇 등 새로운 주체 및 주체성의 법적 승인 가능성이 탐구되고 있다.
또한, 민법과 형법 등 법학의 고유한 법률해석학에서도 지능정보사회에 새로이 출현하는 법적 쟁점 및 현상을 규율하기 위한 적극적인 논의가 펼쳐지고 있다. 이는 기존 법리의 재해석, 법정책적 차원에서의 제도 보완, 그리고 지능정보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법개념의 창설 등으로 구체화된다. 이는 법의 패러다임 변화 논의가 비단 강인공지능이나 초지능의 출현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현재 시점에서 상용화가 검토되고 있는 자율주행 자동차, 킬러로봇, 의료로봇 역시 민법상의 고의 및 과실 개념, 그리고 책임법리를 온전히 적용할 수 없는 다양한 문제 상황들을 불러올 것으로 예측되는 것이다.
나아가 지능정보사회에서는 사법실무 및 법률자문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예상된다. 영미법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같은 대륙법계에서도 지능형 법률서비스 플랫폼의 개발이 촉진되고 있다. 이로 인해 법문서에서 법원칙을 발견하고, 해당 사안에 적용될 수 있는 판례를 검색하며, 법실무 관련 각종 문서를 작성하는 법률전문가의 가장 전형적인 역할이 상당 부분 대체될 수 있게 된다. 이는 법률전문가에게 새로운 전문성 역량이 요청됨을 의미하며, 따라서 법조인을 양성하는 법률교육에서의 대응 역시 수반돼야 할 것이다.
이렇듯 지능정보사회에서 법학이 직면하게 된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의 과제는 과학기술 분야와의 융합연구를 더욱더 촉발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한편으로 법에서 법적 정의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과학적 합리성이 수용되고, 다른 한편으로 과학기술 역시 결코 가치나 윤리에 중립적일 수 없음을 승인해 법규범을 내면화하는, 진정한 의미의 상호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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