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건학에 즈음하여 되돌아본 우리대학의 역사
제2의 건학에 즈음하여 되돌아본 우리대학의 역사
  • 이종식 / 인문 조교수
  • 승인 2024.06.1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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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공대는 한국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이기에 앞서 과학자의, 과학자에 의한, 과학자를 위한 대학이다
▲김호길 총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낸 1984년 12월 31일 자 서신의 육필 원고. 이 서한 안에는 김 총장이 구상한 연구중심대학의 특징들이 대체로 명료하게 정리돼 있다
▲김호길 총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낸 1984년 12월 31일 자 서신의 육필 원고. 이 서한 안에는 김 총장이 구상한 연구중심대학의 특징들이 대체로 명료하게 정리돼 있다

*본 기사는 다음 연구논문을 재구성한 것이며,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웹사이트에서 무료로 전문을 이용할 수 있다. 이종식, “대학교수들을 위한 연구 “왕국” 만들기: 물리학자 김호길의 연암공학원 및 포항공과대학교 구상과 건학,” 『한국과학사학회지』 제46권 제1호, 2024. 

우리대학 구성원들이 철석같이 믿어 의심치 않는 명제가 하나 있다. 바로 우리대학이 한국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우리대학이 세워진 1986년 이전에 한국에는 수월성 있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대학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전문 과학사 연구자들은 보다 앞선 1950~60년대나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도 연구를 수행했거나 수행하기를 지향했던 여러 대학의 역사를 분석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대학이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이라는 이 ‘당연함’을 받아들이게 됐을까? 우리대학을 한국 최초 연구중심대학이라고 할 때, 그 ‘연구중심대학’이라는 개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과거의 유사한 모델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더 나아가 1980년대 한국 과학기술사의 맥락에서 대학은 어떻게 ‘연구’, 특히 과학기술 연구개발과 연결되고 있었는가? 

이 모든 질문과 대답의 중심에는 물리학자 김호길이 있다. 오랜 해외 생활로 영미권 유수의 ‘연구 대학(Research university)’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 그는 언젠가 한국에도 ‘국제적 수준의 연구 중심의 이공계 대학’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갖게 된 것이 1970년대 중엽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당시 기존의 국내 대학들이 연구보다는 교육 활동에 초점을 두고 활동하는 교수들의 공동체라고 보고, 그 대안으로 연구 활동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대학 모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대학에서의 연구를 주도할 주체로 김호길은 해방 이후 1950년대에 대학 교육을 받고 1960~70년대에 구미 과학계에서 성장해 1980년대에 중진의 반열에 오른 1세대 한인 과학자들을 호명했다. 요컨대, 그가 구상했던 ‘연구중심대학’ 우리대학의 핵심은 ‘국제 잡지에 논문 낼 수 있는’ 한인 이공계 엘리트 연구 인력이 해외의 기존 직장에서 하던 연구를 최대한 그대로 포항에서 재현·지속할 수 있게 해 주는 ‘왕국’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때까지 국내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던 고가의 최첨단 연구 장비를 포항에 도입하고자 했다. 또한 당장 교수들의 연구를 보조할 수 있는 인력으로서 대학원생을 양성·동원할 수 있는 대학원 위주의 대학을 만들고자 했고, 이 점과 연동해 학부 교육 과정은 적어도 그 규모 면에서는 최소화돼야 했다.

이러한 전례 없는 모형의 대학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물론 재원이 필요했다. 김호길은 1980년대 초 제5공화국 시기에 확산했던 산(기업)·학(대학)·연(연구기관) 협동이라는 방식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앞선 박정희 유신 정권과 대별되는 독특한 과학기술 정책을 새로이 입안하고자 했다. 그 결과 대두된 것이 산·학·연 협력 패러다임이다. 즉, 박정희 시대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필두로 한 정부출연연구소에 연구개발 자원이 집중됐던 것과 달리,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연구개발은 △정부 △민간 기업 △대학 △여러 관민 연구기관이 폭넓게 협력하는 패턴을 지향하게 됐다. 김호길의 ‘연구중심대학’ 구상도 1980년대 특유의 산·학·연 구도의 맥락 속에 위치할 수 있으며, 그는 대학에서의 연구를 위한 재원을 국가나 기업의 유관 기관과 연계함으로써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한편 모기업 포항제철의 입장에서 우리대학은 그 자체로 단일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기업 차원에서 산·학·연을 구현하기 위해 포항제철은 우리대학 외에도 자사의 기술연구소(오늘날의 RIST)에 막대한 투자를 기획하고 있었다. 김호길은 다소 낙관적으로 신생 우리대학이 포항제철(이하 포철) 및 포철 기술연구소의 자금력을 이용함으로써 빠르게 본 궤도가 오를 수 있을 것이며 향후 국가 연구 과제를 다수 수주함으로써 재정적으로 자생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 같다. 이는 결코 대가 없는 지원이 아니었다. 1990년대 중엽까지 우리대학은 주요 연구 시설 사용 및 연구비 수주 절차에 있어 전적으로 RIST의 통제를 받아야 했고, 연구 성과 또한 대학이 아닌 RIST의 실적으로 귀속됐다. 연구의 성격 면에서도 우리대학과 RIST 사이의 분업이 원활하지 않아 개인 및 단일 분야 위주의 연구와 학제 간 대형 집단 연구 간의 불균형이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김호길과 우리대학은 애초의 전망과 예상보다 더 포철이라는 대기업과 한국 산업계 전반의 힘에 종속되고 말았다. 김호길 사망 전후 우리대학은 대학의 연구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포철 이외의 산업체나 국가로부터의 연구비 수주 비중을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대학에 대한 모기업의 영향력은 줄곧 막강했다. 이러한 면에서 김호길의 ‘연구중심대학’ 구상은 일종의 ‘신생 사립 연구중심대학’이 갖는 강점과 한계를 모두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중심대학’ 우리대학의 건학사로부터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몇 가지 논점이 더 존재한다. 첫째, ‘세계 최고의 연구’를 생산하는 ‘국제적 수준’의 대학의 성패를 판별하는 기준이 모호했다는 점이다. 1990년대 전반 우리대학은 △교원 수 △연구비 규모 △학생 수 △교수 대 학생 비율 △소장 연구 장비의 환산 가치 심지어 도서관 장서의 수 등을 제시하며 ‘국제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 건설이라는 소기의 목표에 접근해 가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같은 양적 지표 외에 더 근본적인 질적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김호길로서도 불명확했던 것 같다. 사실 포철 측 인사들이 염원하던 성공의 질적 지표는 따로 있었다. 놀랍지 않지만, 그것은 우리대학이 한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기관으로 거듭난다는 목표였다. 김호길은 노벨상이 과연 우리대학의 성패를 결정짓는 유일무이한 기준인가에 대해 대체로 양가적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포철로부터 막대한 투자를 받아 우리대학이 단기간에 ‘우리나라’의 ‘가장 우수한 학교’가 돼야 한다면, 무엇이 그 대학을 ‘가장 우수’하게 만드는지, 대학의 성공 여부를 어떠한 가치로써 평가해야 하는지, 그 또한 노벨상 외 다른 기준을 선뜻 제시하지 못했다. 

두 번째 화두는 연구중심대학에서 연구와 연구 이외의 요소 간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전반적으로 우리대학은 ‘연구’ 기능에 치중한 나머지 ‘교육’을 비롯한 여타 대학의 여러 기능에 대해 상대적으로 굳건한 철학을 갖추지 못한 채 성장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점에서 정성기가 김호길에게 보낸 다음 서신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포항공대를 비롯한 모든 대학에서 전문 vs. 교양 교육에 어떤 Balance Point를 택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Continuing Debate가 있을 것 같지만, 저희 대학의 경우에는 일반 University보다는 MIT와 같은 곳과 더욱 많은 공통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Recent <Science>의 Copy(동봉)에서 보시는 대로 MIT 교양 과정에 대한 Debate는 흥미롭지만, 또 우리와는 그 목표에 있어서 시대적 차이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우선은 우리 경우엔 Problem Solver/Doer를 양성하는 게 급선무이고, 그 후에는 점차적으로 Phase와 Timing에 맞추어 교양 쪽으로 더욱 많은 Emphasis를 두어야겠습니다”(정성기가 김호길에게 보낸 서신(1987.08.22.), 포스텍 아카이브).

‘좋은 연구자’를 교육하는 것과 ‘좋은 인간’을 교육하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우리대학 초대 총장과 미래의 3대 총장은 1987년 시점에서 우리대학이 ‘교양’ 교육으로 대표되는 연구 외적 소질 계발을 목표로 하는 전인교육을 제대로 시행할 형편이 못 되며, 미래에는 이 점을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렇다면 2024년 현재 우리가 되물어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과연 우리대학은, 그리고 그와 유사한 한국의 연구 중심 이공계 고등교육 기관들은 지난 수십 년간 ‘문제 해결자 및 실행가/집행자(Problem Solver/Doer)’만을 양성하는 ‘급선무’의 단계를 벗어나는 교육 철학과 교육 과정을 발전시켜 왔는가?

▲익명의 90학번 새내기가 김호길 총장에게 보낸 서신
▲익명의 90학번 새내기가 김호길 총장에게 보낸 서신

김호길은 이러한 한계를 모르지 않았다. 한국에 ‘국제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을 건립한다는 전인미답의 사업을 감당하는 일은 그로서도 실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도 자못 지쳤던 모양이다. 1990년 10월 김호길은 학부 1학년 학생으로부터 익명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학장님 보십시오. 지난 11일 강당에서 연설하실 때 먼발치에서 뵀는데 며칠 되진 않았지만 그동안 건강하셨는지요. …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 보시겠다고 의지를 굳게 가지시고 지금까지 노력해 오신 학장님도 전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설하는 도중에 이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 게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전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그런 학장님이 아니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지쳐서 못하겠다,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선 정말 참다운 대학은 세울 수 없구나!” 하며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습니다. … 그렇지만 학장님!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학장님의 학생 중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학장님이 가지신 의지만은 결코 굽히지 마십시오. 진정 우리 학교를 위하고 싶어하고, 그런 학교를 위해서 뭔가 하겠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원동력으로 삼아서 계속해서 노력해 주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익명의 90학번 새내기가 김호길에게 보낸 서신(1990.10.30.), 포스텍 아카이브).

김호길에게 이 90학번 새내기의 절절한 서신이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을지 현재로서는 알 방도가 없다. 다만, 그는 1994년 4월 사망할 때까지 포항을 떠나지 않고 ‘연구중심대학’의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비록 대학 건립과 동시에 추진했던 방사광가속기(현 포항가속기연구소)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김호길은 1993년 3월 현재 교원 192명, 학사과정 재학생 1,162명, 대학원생 786명, 직원 231명, 연구비 총액 191억 5,700만 원의 규모를 갖춘 대학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우리대학 건학 역사의 중심에는 단연 김호길이 있었다. 1980년대 한국 과학기술사의 맥락을 반영한 모델로서 ‘연구중심대학’을 기획하고 실현해 냈다는 점 외에 우리대학의 역사에 실로 남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모든 지난한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자 김호길이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 온전히 짊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대학은 그 실질적인 설립 주체를 과학자로 간주할 여지가 충분하다. 과학자가 과학자를 위해 만든 이공계특성화대학이 바로 우리대학인 것이다. 한국의 대학들이 대부분 △국가 △기업인 △독지가 △종교인에 의해 설립됐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는 단연 돋보이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