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다섯 달이 지났는데 현재 학교의 상황을 한번 살펴보자.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은 학교내의 도로 곳곳에 쓰여져 있는 ‘SLOW’라는 글자이다. 도로상에 ‘SLOW’는 백 번 생각을 해도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을 떠나, 어디를 찾아봐도 ‘천천히’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셔틀버스를 타려고 버스 정류장에 갔다. 버스 시간표를 살펴보면 전부 영어로만 되어있다. 학교에는 영어를 아는 사람만 오는 것이 아니다. 영어를 모르는 한국 사람은 학교에 와서 셔틀버스도 못 탈 지경이다. 영어 ‘공용(共用)’이 아니라 ‘전용(全用)’을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2월 12일, 교내회보에 올라온 통신신의 글을 보면, 시외나 국제전화를 걸 때에 아래의 번호를 사용하면 더 싸게 걸 수 있으니 협조를 바란다는 내용이 영어로 올라와 있고 그 밑에 한글로 나와 있다. 학교 식당의 식단표를 보면 영어로 메뉴가 먼저 나오고 그 밑에 한글로 나온다. 이것은 공용은 공용이지만 영어 ‘우선’이다.
한국 안에서 주한미군기지를 제외한 어느 곳을 가보더라도 도로상에 영어로만 ‘SLOW’로 쓰여진 곳은 없다. 대한민국 땅에서 유일하게 도로상에 영어로만 쓴 ‘SLOW’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포항공대다. 제대로 잘 안 지켜지는 경우의 예만 들었으니, 그럼 몇몇 부서에서 주의만 기울이면 끝나는 문제일까?
연합뉴스의 기사를 한번 더 보자. ‘포항공대 관계자는 ‘영어 공용 캠퍼스’ 계획 가운데 많은 부분이 현재 진행 중”이라며 “교육, 연구, 행정 등 모든 분야에서 영어공용이 이뤄지면 세계적인 대학으로 충분히 인정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7월22일 연합뉴스)
정작 가장 큰 문제는 ‘영어 공용’을 하면 세계적인 대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다. ‘세계적’이 되는 데 중요한 것은 ‘영어’가 아니라 ‘내용’이다. 좋은 연구 결과를 내는 실험실이 늘어가면 자동적으로 사람들이 몰릴 것 아닌가. 과연 언어가 불편해서 안 오는 것일까 아니면 올 ‘내용’이 없어서 안 오는 것일까. 영어 공용을 통해서 그 ‘내용’의 부실함을 과연 얼마나 메워 줄 수 있을까. 또, 자꾸 ‘실용성’ 하는데, 과연 얼마나 실용적일지. 행여나 이것이 무조건 ‘미국식 = 가장 좋은 것’, 아니면 미국과 많이 비슷해질수록 좋다고 생각을 가진 한 학교 관계자의 그릇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행정적인 면에서 외국인의 편의를 위한 영어 공용과 대학원 영어 강의는 구분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한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영어 강의의 경우, 강의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 강의가 한국어로 진행되느냐 영어로 진행되느냐는 차이가 없었다. 또, 외부에 선전하는 것과는 달리 대부분의 교수들은 영어에 그리 능통하지 않기 때문에 미묘한 내용은 아예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고 한국어로 진행되는 수업도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꿀 먹은 벙어리인데 영어로 수업을 한다고 활발하게 영어로 질문을 할 것 같지도 않다. 이것이 장기적으로 과연 학교에 도움이 될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영어 공용과 같은 경우에는 미리 구성원들간의 충분한 의견 교환이 있어야 했다. 또한 공용화를 하기로 해서 한글ㆍ영어를 같이 쓴다면 영어 ‘전용’이나 ‘우선’이 아닌 ‘공용’이라는 말에 걸맞는 일관된 기준을 세워서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대학원 영어 강의의 경우도 꼭 해야 한다면 제대로 된 영어 강의를 할 수 있도록 대책 마련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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