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만평 | . | 2018-04-18 18:59
30대 후반의 나이로 40대를 곧 맞이하게 될 요즘, ‘슈가맨’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종종 보게 된다. 지금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옛날 가수들을 소환해 그때를 추억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그것을 볼 때마다, 그 노래가 유행하던, 어쩌면 나의 인생의 가장 힘들었던,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장 자유롭고 행복했던 20대 초반을 생각나게 해줘 추억에 젖곤 한다. 20대에는 참으로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대학의 학업 환경, 너무나도 크게 주어진 자유, 불안정한 미래, 선택의 갈림길 등을 마주쳤지만, 뭘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나는 대학 학부를 8년하고도 반을 더 다녔다. 그간 4년의 학기, 3년의 군대, 1.5년의 휴학이 있었다. 지금 느끼는 단 한 가지는 “그때 정말 잘했다!”라는 것이다. 3학년 1학기에 군대에 가기로 한 이유는 여러 방황을 한 후였다. 외국어고등학교를 나와 기계공학과에 왔기에, 새로운 공학 과목을 따라가기에는 벅찼다. 잘해 나가는 친구들을 보고 좌절감을 맛보며 “내게 이 길은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방황이 시작됐고, 게임에 매진했으며,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보내게 됐다. 공학이
노벨동산 | 노준석 / 기계·화공 교수 | 2018-04-18 17:33
지식에 대한 인류의 욕구는 세월을 불문하고 존재해왔다. 기원전 3세기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으며, 중세 시대에는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스투디움 게네랄레(Studium Generale)’를 설립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러 학문 분야를 가르치는 ‘대학(大學)’이 등장하였으며, 이는 현대까지도 명실상부한 고등교육기관이다. 우리대학은 연구 중심 대학으로서, 지난 30년간 최고의 고등교육과 연구실적을 제공해왔다. 그런데 우리대학이 최근 SES, 산학일체교수 등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가치창출 대학으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과연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보자.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왕조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다. 이처럼 학문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자본이 필요하다. 현대 과학 역시 예외는 아니다. 4세대 방사광 가속기 건설에는 4,000억 원 이상이 소요되었으며, 2017년 우리대학의 예산은 2,400억 원에 이르렀다. 이는 안타깝게도, 자본이 없으면 학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행히도 우리대학은 포스코의 지지 덕에 훌륭한 연구 성과를 내고 뛰어난 교수님들을 모셔왔으며, 이를 기반으로 우수한 학생들에게 적합한 교육을 제공할 수
독자리뷰 | 허태양 / 생명 16 | 2018-04-18 16:56
대학은 늘 변화의 정점에 서 있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던지며 미지의 학문 분야를 개척해 왔고, 끊임없는 문제의식으로 사회가 논의하고 토론해야 할 의제들을 설정하는 능력을 보여 줬다. 생각의 폭을 넓혀 줬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왔으며, 정치, 경제, 사회, 산업 시스템의 선순환이 가능하도록 새로운 사고의 틀, 도구들을 제공해 왔다. 그러한 변화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 동시에 대학은 가장 변하지 않는 집단으로 버텨 왔다. 몇 년째 바뀌지 않는 강의, 정량적 목표가 최우선이며 언제나 그 목표를 달성하는 연구, 수직적인 상하관계만 존재하는 경직된 문화 등 다양한 이슈들이 존재한다. 대학의 사명인 교육, 연구, 봉사의 측면에서 현재의 시스템이 최선인가 늘 묻지 않을 수 없다.변화에는 대부분 고통이 수반된다. Status Quo(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는 집단과 더 나은 미래를 요구하는 집단과의 충돌 또한 불가피하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모든 구성원의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쉬워진다. 현재의 대학은 그런 변화의 요구에서 자유로운 안정적인 시스템인가? 학령인구의 감소는 대학의 뿌리를 흔드는 문제이다. 우수한 학부 신입생의 지
사설 | . | 2018-04-18 16:54
과학기술은 인류가 처한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게 해주었다. 이 사실을 묘사할 때, 우리는 ‘싸움’, ‘정복’ 등의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들은 기아와 질병 같은 역경들과 인간이 싸워 승리했다는 표현인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 표현은 조금 어색하다.싸움엔 서로 의지를 거스르는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과학기술의 경우 그 과학기술이 적용되는 대상은 ‘자연(自然)’이고, 그 자연은 문자 그대로 그냥 거기에, 자기(自)의 원리에 따라 그렇게(然) 있는 것이지 어떤 의지를 갖추고 인간과 싸움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생각해보면, 과학기술과 그 과학기술이 적용되는 자연 간에는 어떤 대립도 싸움도 없다. 특정 물질에 생명체는 이렇게 저렇게 반응할 뿐이고, 힘을 가하면 물질은 이렇게 저렇게 변형될 뿐이지, 그 생명체나 물질이 자신의 의지를 고집하거나 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다만, 과학기술을 소유한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그 과학기술의 사용을 제한할 수는 있다. 이 경우, 그 과학기술을 가진 자는 못 가진 자가 그 과학기술을 사용할 것인지 말지를 결정할 권리, 곧 힘을 갖게 된다. 이런 경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있을 수 있는 의지의 충
노벨동산 | 장수영 / 산경 교수 | 2018-03-28 13:21
만화/만평 | . | 2018-03-28 1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