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눈으로 대한민국 대학을 바라본다
프랑스의 눈으로 대한민국 대학을 바라본다
  • 이상빈 / 인문사회학부 대우교수
  • 승인 2017.05.24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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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에 온 후, 나는 매일 학교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다. 이제 좀 둔감해질 만도 한데, 나의 왕성한 호기심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40년에 걸쳐 공부한 인문학을 공대라는 낯선 환경에서 풀어내는 일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재미있고, 인문계 학생들과 전혀 다른 우리대학 학생들의 반응도 흥미로우며, 무엇보다도 꽃과 나무로 뒤덮인 학교 풍경이 계절의 변화에 대해 지속해서 관찰하게 만든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전광판과 포항공대신문을 통해 접한, 프랑스의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 및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와의 순위 경쟁 뉴스다. 이들 학교와 국립행정학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는 두말할 필요 없이  프랑스 최고의 3개 그랑제콜이다. 프랑스 유학 시절 이 학교들을 직간접으로 체험해본 바 있어서, 이 학교들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 학교들인지 충분한 느낌이 있다. 저녁 무렵에 오가며 접하는 전광판의 글귀는 자연스럽게 우리대학과 프랑스의 주요 그랑제콜, 혹은 한국의 대학교육과 프랑스의 고등교육에 대한 비교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파리의 울름(Ulm) 거리의 고등사범학교가 배출한 인재들 면면도 대단하다. 이 학교 출신자 중 노벨상 수상자가 13명, 필즈메달 수상자가 10명, CNRS(고등과학원) 금메달 수상자가 27명이라는 점 외에도 다수의 대통령, 총리, 장관을 배출했다는 사실은 우리대학이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고등사범학교 학생 수는 대학원생을 포함해 2,700명에 불과하다. 우리대학과 거의 비슷한 규모다.
프랑스에서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교수 자격시험 통과와 별개로 박사학위가 필요하다. 하나 그랑제콜들은 오랫동안 박사학위를 부여하지 않았고, 각 분야의 학자들은 그랑제콜에서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는 방식을 택했다. 필연적으로 그랑제콜과 대학이 학술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서로 협력하고 또 교류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동류의식과 배타성이 강한 우리나라의 현 대학 구조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제도다. 적어도 인문학 쪽의 시각에서는 그렇다. 그런 까닭에 그랑제콜 출신들이 사회 상층부의 요직을 독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절대 대학의 경쟁력을 무시하거나 자신들만의 리그를 구축할 수 없다. 실제로 고등사범학교에 배속된 390명의 교원은 다른 대학에 재직하는 교수이거나 CNRS에 소속된 연구자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한 CNRS는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을 망라한 국립기관으로, 이 정부 기관에 소속된 연구원 숫자만도 7만 명을 선회한다. 그러나 이 기관 역시 대학과 적대적이지 않다. 학자들의 생계를 국가가 보장함으로써 연구에 관한 한 대학과 대학 바깥이 서로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이 수직적인 구조로 작동되는 닫힌 시스템이며 그로 인해 적지 않은 문제들을 낳고 있음에 비추어볼 때, 주요 선진국들과 현저히 다른 프랑스 시스템은 매혹과 우려를 동시에 낳는다. 급변하고 있는 21세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유럽의 전통적인 귀족교육을 답습하고 있는 그랑제콜 시스템이 오늘날 필요할까? 교육 평준화가 화두인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엘리트 교육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10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천재의 출현을 소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인문학이 대학에서 사라지고 있는 작금의 우리 현실은 이러한 천재들의 ‘놀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분명한 것은 프랑스의 유기적인 시스템이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을 확보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프랑스 교육의 인문학적 전통을 훌륭하게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 최고의 목표를 두는 ‘양심의 함양’과 ‘공동선의 확보’에 두는 프랑스의 인문학적 태도는 사실 실용주의를 앞세우는 미국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우리의 교육도 미국의 제도에 상당히 닮아있다. 그러나 고등사범학교의 기초를 세운 몽주(Monge), 베르톨레(Berthollet) 등의 무수한 과학자들, 볼네(Volney) 등의 작가나 철학자들은 이미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면서 실사구시의 정신을 익혔다. 또 사회학, 문학, 철학 쪽에서 프랑스가 배출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에서부터 이론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이러한 풍경은 인문학에 대한 우리 쪽의 막연한 이해를 뛰어넘을 만하다. 그것은 사회와 내가 분리되지 않은 몸이라는 생각, 학문이 사회로부터 비롯되기에 그것을 다시 사회에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감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프랑스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전통이 도도하다. 자연과학도들도 교양과 문화예술에 대한 감각을 예외 없이 확보해야 한다는 얘기다. 어떤 의미에서 전공에 대한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 기술만 추구하는 사회는 가공스러움만 낳을 뿐이다. 효율성과 경쟁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낳은 폐해를 이미 목도하지 않았는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문학예술과 역사를 포함한 인문학 전반에 관심을 가지는 포스테키안이기를 바란다. 세상의 갈등에도 지속해서 관심을 가져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를 통해, 아니 그를 통해서야 우리는 진정한 최고 반열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