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기획] 디지털 시대의 ‘책’
[주제기획] 디지털 시대의 ‘책’
  • 표정훈 / 출판평론가
  • 승인 2001.09.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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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것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해가는 정보화시대이다. 이런 세상에서 책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또한 우리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지를 이번호 주제지획에 담았다.
-모든것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해가는 정보화시대이다. 이런 세상에서 책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또한 우리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지를 이번호 주제지획에 담았다.- 편집자 주

오래 두고 가까이 사귄 ‘벗’


기차 안 풍경 하나. 젊은 미녀가 책을 읽는다. 건너편 좌석 청년의 눈길이 은근하다. 그 눈길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책만 읽는 미녀. 이윽고 청년은 휴대전화 서비스를 통해 미녀가 읽는 책의 제목을 알아낸다. 원제가 ‘노르웨이의 숲’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였던 모양이다. 드디어 청년은 입을 연다. “노르웨이 숲에는 가보셨나요?” TV에서 볼 수 있었던 휴대전화 광고 장면이다. 광고는 그쯤에서 끝나지만, 솔직히 그 다음이 걱정된다.

상황으로 보아 청년은 ‘상실의 시대’를 읽지는 못한 처지다. 그런데 미녀가 ‘상실의 시대’와 하루키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어하기라도 한다면? “이 휴대전화 정말 좋지요?” 이렇게 얼버무릴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청년이 노트북이나 전자책 전용 단말기를 지니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실의 시대’ 파일을 내려 받아 읽은 뒤, 좀 더 확실하게 미녀에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기차 안의 두 승객이 다른 매체 수단을 통해 같은 내용의 책을 읽는다는 것. 이미 얼마든지 가능한 장면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종이책을 읽는 승객의 숫자가 많다. 그러나 전자책을 읽는 승객의 숫자는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것이 틀림없다. 원정을 떠날 때마다 엄청난 양의 책을 수레에 담아 가지고 갔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나폴레옹이야말로, 전자책을 가장 반길지 모른다. 수레도, 수레를 움직일 말도, 말을 부릴 병사도 필요 없으니 말이다.

정말 그렇다. 책을 보관할 공간도 필요 없다.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하이퍼텍스트 기능을 통해 인터넷 자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읽을 수 있으니 형설지공의 고사도 무색해진다. 마음에 드는 글꼴을 선택할 수도 있다. 책값도 종이책에 비해 저렴하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제작비 절감, 재고부담 감소, 물류비 절감, 소량 주문제작 가능, 부분 판매 가능, 구간 혹은 절판도서 유통 가능 등의 장점이 있다.

환경보호의 측면에서는, 종이를 만드는 펄프의 주원료인 침엽수를 보호할 수 있다. 전자책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저작권 보호 문제도 폐쇄형 전용 단말기, 즉 문서편집이나 복사본 제작에 쓸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올릴 수 없는 환경의 단말기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실력이 뛰어난 크랙커들을 끝까지 물리칠 수 있는 암호기술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 전자책 솔루션 개발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이쯤 되면 문자 그대로 ‘게임 오버’가 아닌가?

그러나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 세계화의 물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전 책의 전자책화, 디지털화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나도 여기에 속한다) 논지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전자책이 책이라는 물건, 즉 책의 ‘몸’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미끈한 모습의 전자책 리더라 할지라도, 사람의 몸이 종이책과 만나 이루는 다양한 느낌과 할 수 있는 일을 대체할 수는 없다. 구기고, 찢고, 던지고, 어루만질 수 있는 책의 몸, 바스락거리고, 냄새 나는 그 몸이 내 몸과 만나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몸과 몸이 만나는 일이고 보니 일종의 밀회, 즉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읽는 순간 책 하나와 나 하나가 만나는 유일무이의 관계가 시작된다. 그 관계는 물리적인 관계임과 동시에 의미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연인 관계와 꼭 닮았다. 모니터 속의 디지털 콘텐츠로서의 책과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오랜 사귐의 역사가 종이책과는 가능하다. 포스트잇을 붙여 놓을 수도 있고, 맘대로 종이 이곳저곳에 메모를 할 수도 있으며, 자기 나름의 부호를 기입할 수도 있고, 다른 자료의 관련 부분을 찢어 붙여 놓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화장실에서 급할 때 사용하거나 코를 풀 수도 있다.

독서 행위에서의 위치 감각, 즉 내가 지금 책의 어느 부분을 읽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도 각별하다. 책을 읽는 동안 책의 전체 두께를 사실상 계속 확인하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모니터에 표시된 페이지 숫자만으로 위치를 확인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전체를 파악하면서 특정 부분을 읽어나가다가 다른 부분을 넘겨 볼 수도 있고 접어서 표시한 페이지로 건너 뛸 수도 있다. 요컨대 나와 책의 관계를 나 자신이 온전히 주도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종이책 예찬론이 되고 말았다. 물론 전자책의 상대적 효율성을 무시할 마음은 없다. 특히 대량의 지식정보를 하나의 매체 수단으로 집적, 활용할 수 있는 공간적 효율성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효율성을 이유로 책과의 유일무이한 오랜 사귐의 역사를 포기할 마음이 없다. ‘읽는’ 행위가 눈으로 글자를 보고 그 의미를 인지하는 일이라면, ‘책을 읽는’ 행위는 책과 온 몸으로 사귀는 일이다. 몸으로서의 책이 아닌 비트로서의 책이라면, ‘읽는’ 행위는 가능할지 몰라도 ‘책을 읽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오래 두고 가까이 사귄 벗’이 친구라고 하던가. 효율성이나 효용 가치를 따져 사귀는 친구는 친구일 수 없다. 나는 책이 앞으로도 계속 나의 친구, 아니 우리 모두의 친구로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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