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평론] 보르헤스의 소설들-현실과 허구 사이의 또 하나의 세계
[나도 평론] 보르헤스의 소설들-현실과 허구 사이의 또 하나의 세계
  • 신정규 / 물리 2
  • 승인 2001.0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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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언어의 시대입니다. 과거에 언어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을 때에는 세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는 언어가 생각하는 방법에 작용하는 정도가 너무 커져버렸지요.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창조해 낸 언어가 우리를 지배하는 듯한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십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언어에 자신들도 모르게 부여하여 왔었던 절대성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되었지요. 언어는 유동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실이 언어로 만들어지는 순간에 절대적인 성질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어버립니다. 실제로 우리가 배우는 수많은 과학적 이론들은 언어가 되면서 진리 아닌 진리가 되어버렸지요. 문학작품도 예외는 아니지요. 지금부터 소개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들은 문학이 어떤 것인가, 언어와 세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을 열어놓은 글들입니다.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참 특이합니다. 처음에 접하면 글의 혼란스러움에 놀라게 되지요. 글의 대부분을 읽는 사람에게 맡겨버리기 때문에 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머리안에서 책을 하나 더 써야 하지요. 게다가 보르헤스가 만든 세상은 현실과 같으면서도 또 완전히 다릅니다. 자신의 글이 하이퍼텍스트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작가가 만들어 낸 휘어진 세상은 읽는 사람의 사고까지 같이 휘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들지요. 글들에는 수많은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대부분은 사실에 기초하지만, 몇몇은 현실과는 다른 허구로 된 각주이지요. 웬만한 지식을 가지지 않고서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해 낼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이 짧은 말은 흔히 볼 수 있는 괜찮은 책들의 좋은 기초가 되어줍니다. 꼭 괜찮은 책만은 아니지요. 가끔 볼 수 있는 엉터리로 쓴 무협소설이나 어설픈 환타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주인공이나 조연들의 입에서 이해하기 쉽게 직접 말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보르헤스는 독자를 완벽하게 기만해 버립니다. 절대와 상대, 또는 실제와 환상, 현실과 허구의 틈. 실제로 존재하는 많은 것들 사이에서 이 두 가지의 관계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보르헤스가 창조해내어 가져다 주는 세계는 현실과 정말 유사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면 또한 현실이기도 한 이상한 세계이지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바벨의 도서관’을 10년전에 읽었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98년의 저에게는 간단하게 다가왔었지요. 프랙탈과 하이퍼텍스트. 지금에 와서는 우리는 그의 글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제대로 된 이름은 아니지만, 더 이상 추상적인 어떤 형태로서의 글은 아니지요.

가장 짧은 소설중의 하나인 ‘모래의 책’에서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푸코의 세계관과 닮은 모습을 잠시 보여줍니다. 하지만 내용은 독자의 손에서 힘이 빠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무한한 책을 손에 넣은 후 무한하지 않을 가능성을 의심하며 동시에 무한함을 두려워하는 보르헤스의 모습에서, 전 감당할 수 없게 커져버린 우리들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느꼈었지요.

하지만 지금 책을 다시 펴서 약간만 다르게 생각을 하면 위와는 또 다른 감상이 하나 나오게 될 것입니다. 독자에게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주는 동시에, 무책임할 정도로 독자에게 많은 부분을 떠넘겨버리는 이십세기 인문과학계의 치사한 할아버지를 한번쯤 만나보는 것도 새학기를 시작하는 포스테키안에게 신나는 경험이 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