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정호 / 신소재 교수
  • 승인 2015.09.09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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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수월성을 요구하는 한 정부연구과제의 심사위원 명단이 최근 공개되었다. 심사위원 소속기관과 연구업적을 보며 심사위원으로서의 적격성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들은 발표평가 중에도 제안 내용이나 아이디어에 대해 잘 파악을 못하고 핵심을 비켜가는 질문을 할 때가 많다. 심사위원이 제안 내용에 대해 비전문가이다 보니 어찌보면 당연하다. 학연과 지연을 배제하고 심사위원을 소극적으로 선정하는 국내 평가시스템에서, 비전문가에 의한 과제평가는 일반화되었다. 그러다 보니 연구제안의 우수성보다는 논문업적의 정량적 지표가 평가를 좌우하는 경향이 크다.
연구과제 평가의 문제만이 아니다. 포스텍에서 승진, 테뉴어, 교원업적 외에 신임교원 후보자를 평가할 때에도 정량적 지표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평가대상자의 수월성을 판단하는 힘겨운 과정을 거치기보다 업적의 정량적 수치에 의존하여 손쉽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연구의 동기가 연구의 수월성보다는 논문의 정량지표 향상으로 치우쳐 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바람직한 것일까? 물론 정량지표가 향상되면 연구수준 향상에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량지표가 높은 논문이 좋은 논문이라는 공식은 항상 성립하지는 않는다. 연구자들은 힘들여 연구의 수월성을 높이는 것보다 손쉽게 정량지표를 높이는 방향으로 선회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곧 신속히 연구동향을 파악하고 그 흐름에 빨리 동승해서 순발력 있게 연구주제를 변환해 가며, 그 흐름의 중심에 있는 외국 학자들과 친분을 넓혀가는 것이다. 그러면 비교적 용이하게 논문의 정량지표를 끌어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모방과 개선, 끊임없는 주제변화를 추구하다 보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자기만의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정량지표가 높은 논문이 반드시 학문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정량지표가 높은 학술지들은 지표를 더욱 높이기 위해 학문적으로보다는 사업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크다. 실제 연구경험이 충분치 않은 젊은 편집자들이 비전문가로서 제출논문의 1차 심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학술지의 정량지표 향상을 목표로 하는 사업적 성향이 강해서, 발표기관 및 저자의 저명도 그리고 연구주제의 유행성을 우선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한 분야에서 자기만의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 내어 학문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것도 물론 쉽지는 않다. 또한 독창적인 연구로 학문적 기여도가 높은 훌륭한 결과를 얻었다고 해서 정량지표가 높은 학술지에 실린다는 보장도 없다. 지명도가 낮으면 이들 학술지에서 좀처럼 관심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기만의 독보적인 연구로 학문발전이나 국가와 사회에 커다란 기여를 한다면 지표가 높지 않은 논문이더라도 인생에 걸쳐서 매우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이러한 흐름 속에 포스텍의 학생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대세에 편승해서 논문의 정량지표를 최대한 올리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 소요되고 보상을 제대로 못 받게 되더라도 한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가 되는 길을 택할 것인가?
정량지표 향상에 올인하는 학생들이 꽤 있다.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하다보면 정량지표가 높은 학술지에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도 박사논문의 목적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고, 독창성과 전문성이 모호한 학생을 흔히 접하게 된다. 공동연구자의 도움을 받으며, 학문적 기초나 깊이 있는 이해보다는 성능 개선에 주력하여 쉬지 않고 달려온 데 기인하리라 본다. 학문을 추구하는 학자로서보다 성능개선에 집중하는 기술자의 자세로 연구하고 정량지표 향상에 매달리면, 원하는 대학의 교수직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자기 분야에서 학문적으로 혹은 국가와 사회에 크게 기여하는 학자로 발전해 가는 데 저해될 수 있다.
포스텍의 학생들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과학도가 되길 바란다. 정량지표 평가의 흐름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한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가 되길 바란다. 전문가가 되는 것은 그 분야를 깊이 파고 들어가 이미 확립된 학문의 기초 위에 자기만의 새로운 기초를 쌓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암기식 공부의 틀에서 벗어나, 단순한 지식섭취보다 끊임없이 “왜?”를 질문하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성적향상이라는 본능적인 추구를 탈피하여, 학과를 가로질러 여러 기초과목을 수강하며 이해의 폭을 넓혀가길 바란다. 그러면 향후 대학원, 더 나아가 졸업 후 자기 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다.
포스텍의 학생들은 다른 대학의 학생과 다르기를 바란다.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연구주제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란다. 비록 많은 연구자들이 가던 길을 쉽게 바꾸어서 돌진하더라도, 언론에 언급되는 주제는 미래보다는 과거부터 혹은 현재 당면한 문제를 이슈화한 경우가 많다. 미래를 살아갈 학생들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내다보고 나아가야 한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서 가기를 꺼리는, 그렇지만 꼭 해결이 필요한 길들이 앞에 놓여 있다. 포스테키안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