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 분자프린터
학술 - 분자프린터
  • 송하영 / 화학 통합과정
  • 승인 2015.05.0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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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버크와 분자 프린터
최근 산업 분야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는 3D 프린터가 아닐까. 도면만 있으면 간단한 클릭 몇 번만으로 원하는 구조를 쉽게 만들 수 있다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손에 잡히는 모형부터 거대한 집까지, 3D 프린터만 있다면 자동으로 원하는 것을 뚝딱 만들 수 있다. 심지어 3D 프린터를 이용해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마이크로 크기의 구조를 만드는 연구들도 진행되고 있으니 이제 더 이상 3D 프린터로 만들지 못하는 건 없을 것이라 생각될 정도다.
그렇다면 인간이 조립 가능한 가장 작은 구조체인 분자의 경우는 어떨까? 1959년 <저 바닥에는 충분한 공간이 있다>란 제목의 강연에서 파인만은 ‘분자 크기의 기계들을 만들 수 있다면 원자들을 하나씩 들어 올려 원하는 분자를 조립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말했다. 일종의 분자 프린터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노머신에 관한 연구는 로봇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활발히 진행되진 않아, 파인만의 바람은 아직 우리에겐 먼 길처럼 보인다.
비록 분자 기계가 원하는 분자를 척척 조립해주지는 못하더라도, 화학 분야에선 지금까지 분자를 자동으로 조립해주는 기계를 개발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진행했다. 그 덕에 DNA나 단백질과 같이 단위 구조가 반복되어 합성되는 물질의 경우, 이들을 순차적으로 연결해 자동으로 합성하는 기계가 이미 상용화되어 의약산업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런 분자합성기계들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자동분자합성기계의 가장 큰 해결 과제는 분자를 조립하는 일보다 오히려 조립해 얻은 물질을 깨끗하게 정제해 얻어내는 일이었다. 앞서 말한 DNA, 단백질의 경우에는 고체상 합성이라 불리는 기술을 이용하면 간단했다. 합성하고자 하는 분자를 고체 구슬에 고정하고 그저 씻어주기만 하는 방식으로 쉽게 정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 반복되는 분자들과 달리 의약품 및 인공염료 등으로 사용되는 작은 유기분자들의 경우 고체상 합성 기술이 적용되기 어렵다. 목표로 하는 분자들이 고체 구슬에 고정되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이전까지 일반적인 유기 분자의 합성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최근 일리노이 대학 화학과 교수 마틴 버크가 개발해 <사이언스>에 발표한 이 합성기계는 달랐다. 반응부터 정제까지 모두 기계 안에서 자동으로 진행이 되었다. 거기에 기존 합성기계가 유사한 구조의 단위체들을 단순히 이어 붙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과 달리, 버크의 기계는 복잡한 구조의 물질들을 자동으로 합성해내었다. 어떻게 이런 연구가 가능했던 것일까?
사실 마틴 버크가 원래 하고 싶었던 연구는 분자 기계를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는 암포테리신 B라 불리는 폴리올레핀 분자의 구조를 조금씩 바꿔가며 채널 단백질을 대체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하는 일을 하길 원했다. 기존 암포테리신 B의 경우 매우 치명적인 독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독성을 완화하고 동시에 채널 구조 형성 효과를 증대시키면 마치 ‘분자인공기관’ 형태의 새로운 신약으로 개발 가능할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포테리신 B처럼 복잡한 구조를 갖는 폴리올레핀을 기존 방식으로 합성하려면 각 구조 당 최소 100여 단계의 반응이 필요해 이런 연구를 진행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버크의 꿈은 거기서 끝인 것처럼 보였다. ‘폴리올레핀 분자의 일반적이고 효율적인 합성법’이라는 기술의 장벽이 너무나도 컸었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 박사과정 시절, 버크는 이러한 고민을 갖고 있었다.
당시 버크는 매주 주말마다 절친 라울 콜리와 근처 바에서 맥주를 즐겨 마셨다. 콜리는 고리형 단백질의 생물학적 활성을 연구하던 학생이었는데, 그 연구의 진행이 무척 빨라 버크는 항상 그를 부러워했다. 어느 날 버크는 부러움을 참지 못하고 그 비결을 묻게 되었다. 비결은 바로 단백질 자동합성기계였다. 이 기계가 미리 준비된 여러 종류의 아미노산을 가지고 몇 만개의 단백질 라이브러리를 순식간에 만들어주기 때문에 엄청난 시간 절약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 암포테리신 B 연구를 위해 버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고 명확해졌다. 첫째로 아미노산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올레핀 단위체들을 제작하는 것이다. 그가 목표로 정한 단위체는 2010년 아키라 스즈키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유기붕소화합물의 변형이었다. 두 올레핀 분자 사이를 효과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스즈키 커플링을 이용해 폴리올레핀을 합성하고자 버크는 폴리올레핀의 단위체로서 MIDA라 이름붙인 할로유기붕소 화합물을 개발했다. 이 단위체를 이용해 버크는 2012년 성공적으로 암포테리신 B 유도체를 합성했고 그 독성과 채널 형성과는 서로 다른 매커니즘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였으며, 이로 인해 목표에 한 층 더 가까워졌다.
둘째로 자동합성기계를 만들기 위해선 앞서 말한 고체상 합성과 같은 간단한 정제 과정을 갖고 있어야했다. 그러나 작은 유기분자들의 합성은 고체상 합성과 같은 방식이 적합하지 않았다. 운이 좋게도 추가적인 연구를 진행하던 중, 버크는 자신의 그룹에서 개발한 MIDA가 특수한 용매 조건 하에서 컬럼 크로마토그래피를 진행할 때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고 안에 갇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이용해 버크는 정제 과정에서 특정 용매 조건을 통해 MIDA를 제외한 다른 모든 물질을 씻어내 깨끗한 MIDA 생성물만 얻어낼 수 있었다. 성공적으로 합성기계를 개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버크의 이 연구는 발표 이후 언론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바로 단순한 폴리올레핀이 다양한 천연화합물의 기초골격이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버크는 이 합성기계를 이용해 기본적인 폴리올레핀부터 태양전지에 사용되는 인공유기염료, 그리고 복잡한 고리를 갖는 천연화합물까지 성공적으로 합성해내었다. 버크의 연구가 유기합성연구에 새 지평을 열게 된 것이다.
현재 버크가 개발한 MIDA 분자들은 미국 거대화학회사 시그마 알드리치와 독점 계약을 맺어 판매되고 있고, 자동합성기계는 버크가 공동 설립자로 있는 회사 레볼루션 메디슨에서 제작에 들어갔다. 암포테리신 B 연구를 꿈꾸던 대학원생이 교수가 되어 포기하지 않고 끝장을 본 결과다. 간단하지만 얼핏 보면 무모해 보이는 연구들이었다. 새로운 단위체의 고안부터 합성기계의 제작까지, 암포테리신 B를 연구하고 싶어 하던 과학자가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그 누가 생각했을까. 기초과학에선 어느 연구가 돈이 될지 어떤 성과를 이룰지 누구도 쉽게 알 수 없다. 이런 기초과학의 속성을 바라보고 이해해준다면, 언젠가 국내에서도 위와 같은 멋진 연구가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