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미래의 주인공들에게
대학과 미래의 주인공들에게
  • 서의수 / 창공 대우교수
  • 승인 2015.05.0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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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청탁을 받고, 나는 한국에서 가장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주제를 쓰기로 했다. 내 소견으로는 두번 생각할 것 없이 그 주제는 “갑과 을”의 사회적 신분이 편만한 사회문화의 변화에 대한 것이다.
작년에 김호길 회관에 위치한 내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대학원 연구원이 학부생 연구보조원에게 돈을 주면서 지곡회관에 가서 자기 스낵을 사오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자 학부생은 돈을 쥐고 조금의 주저함 없이 벌떡 일어나 연구실을 나가지 않는가? 내가 그를 즉각 중지시키고 두 연구생에게 “공적인 일이라면 교수인 나에게 심부름 부탁할 수 있으나, 사적인 일은 후배에게도 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대학원생이 말하기를 과거에 선배들의 심부름을 하고 궂은일을 하면서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이 선배가 되고 보니 주위에서 남들이 하는 대로 하게 되었다고 토로하였다. 그리고 조금도 주저함 없이 사적 심부름을 하려고 벌떡 일어나는 그 학부생을 보고, 나는 “갑과 을”의 사회적 신분이 학생들 사이에 깊이 뿌리 박힌 통념임을 관찰하게 되었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배움의 전당에서도, “갑과 을”의 사회적 신분이 진리를 좌우하는가 보다. 그룹 프로젝트를 학생들이 수행하는 과정에 몇 그룹의 몇 학생들이 보고하기를, 선배들이 토론 중 또는 결정과정에서 종종 후배들을 압도한단다. 학교 행사 때마다 선배들의 “갑”행위가 종종 거론된다.
“갑과 을”의 사회적 신분은 공적 조직 내 행동뿐 아니라, 개인관계에까지 깊이 스며들어있다. 연구실에서 궂은일은 후배가 하는 것이 관례이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갑을” 관계가 편만한데 그렇다면 학생들이 교수 앞에서 제대로 말이나 하겠는가? 교수들도 이와 같은 환경에서 성장하였지만, 지금 과연 학생들이 편하고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도록 하고 있는가? “갑을” 관계가 철저한 학생들이 학습 중 도전적인 질문이나 발표를 교수들이나 선배들에게 할 수 있겠는가? 학생들이 학습 중 도전적인 질문이나 발표를 하도록 교수들이 격려하겠는가? 이런 “갑을” 분위기하에 과연 창조적 혁신적인 발전이 제대로 일어나겠는가?
사적인 자리 또는 행사에서도 “갑을”의 꼬리표는 여전히 따라다닌다. 회사 피크닉이 열리면 아랫사람이 궂은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지어 배우자들도 남편 서열을 따라 그 서열이 정해진다. 이름 있는 회사 임원부부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사모님은 그런 사실을 시인하시면서, 내가 전에 궂은 일 했었으니 지금은 대접 받는 것이 당연”한 듯 말하더라.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을갑”의 순환을 계속하며 살 것인가? 포스텍의 어느 교수는 몇 년 전 드레스덴공대에서 연구 중, 한스뮐러 스타인하겐 총장과 함께 출장을 다녀오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단다. 세미나에서 약간 늦은 총장은 회의 테이블 구석에 앉더란다. 한국대학 같으면 가운데 총장자리를 비워놓는 게 상례이지만 거기선 그렇지 않더란다. 먼저 온 순서대로 앉고 총장은 빈자리에 가서 앉아 세미나 연사의 강연을 경청하더란다. 대학발전에 관한 세미나였고 총장이 주재한 세미나였지만 늦게 왔기에 구석에 앉는 걸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였단다. 한국적인 권위주의적 분위기에 익숙한 그에게 꽤 신선한 충격이었단다.
그리고 그가 스타인하겐 총장과 비행기로 같이 비즈니스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예상을 뒤집고 비즈니스석이 아닌 일반석으로 가서 앉더란다. 대학의 보직자만 되어도 비즈니스석을 고집하는 우리나라 대학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단다. 그는 일반석에 총장과 함께 앉아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 소탈하고 순수한 모습에 진한 감동이 다가왔단다.
그는 몇 년 전 대구에서 있었던 대통령 주재 어떤 회의의 에피소드가 비교됐다고 했다. 기초단체장 자리보다 뒤에 배치된 어떤 총장이 갑자기 일어나 자리배치를 탓하면서 “총장은 장관급인데 이럴 수 있느냐”따졌다고 한다. 순간 좌중은 당황한 상황이 됐는데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왜 총장이 장관급이냐 대통령 급이지”라고 받아넘겨 위기를 넘겼다는 기사내용이다.
이렇듯 갑의 행세를 하고 싶지 않아도 남들 다하는데 나만 갑의 대접 안 받는 것 “체면”이 서지 않아 남들 하는 대로 하고 마는 사회풍토 또한 그 “틀”을 깨야 한다.
어느 미국의 역사 깊은 대기업의 연구소에서 35년간 활동하다 얼마 전 포스텍에서 연구교수로 몇 년 간 계셨었던 박사님은 이런 경험담을 말했다.
“(독일에서) 세부 토론할 때는 하급 직원이 부사장에게 보기 민망할 정도로 자유롭게 의사를 표명하는데, 끝에 부사장이 결정을 내리면 모두가 군대개미 같이 진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조직문화가 직위가 높거나 연장자들이 대부분의 발언권을 가진 집단에 비하여 훨씬 경쟁력이 높지 않을까요? 임원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제 일에 대한 결정권 (autonomy)이 있던 저는 회의 끝에 제가 맡을 일에 대해 언질을 주고 왔는데, 한국 회사에서의 확실한 대답이 오는데 두 주일이 걸렸습니다. 그 회사 간부 체계를 아래부터 제일 위 부사장까지 올라가는데 일주일, 그 승인이 아래로 내려오는데 일주일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한국 회사와 담당직원을 신뢰하는 저희 회사를 비교할 때, 어느 쪽이 운영에 드는 에너지가 많이 들고 경쟁력이 영향을 받는가는 명확히 보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