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포항, 이 땅에서 (2): 신라 비석문
문화 - 포항, 이 땅에서 (2): 신라 비석문
  • 김상수 기자
  • 승인 2015.03.1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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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비에 남은 신라판 "쩐의 전쟁"
돌에 새긴 글은 천년이 우습다. 수많은 과거의 이야기들이 사라졌지만, 돌에 새겨 둔 글들은 시간을 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곤 한다. 다만 돌에 새겼다 해서 광개토대왕릉비처럼 거대하거나, 진흥왕 순수비처럼 전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포항의 자랑인 영일 냉수리 신라비(국보 264호)와 중성리 신라비(보물 1758호)도 그렇다. 이번 문화연재에는 잘 보존된 포항의 신라 비석에 담겨진, 신라판 ‘쩐의 전쟁’을 소개하려 한다.
사실 영일 냉수리 신라비는 평범한 화강암에 새겨졌고 비석의 모양도 전혀 비석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앞면, 뒷면 심지어 윗면까지 빼곡히 채운 글에는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 분쟁이 담겨 있다. 진이마촌에 살았던 절거리는 말추, 사신지와 재산 분쟁이 크게 붙었다. 그런데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이 재산 분쟁이 지방관을 거쳐 신라의 중앙정부, 조정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또 이 분쟁이 그냥 넘길 것이 아니었던 것인지 신라 조정에서는 이번 분쟁과 비슷한 선례가 있었는지 알아보라고 법령을 관장하는 관청에 명령을 하달하기에 이른다. 서기 503년에 소위 ‘판례’를 찾으려 애쓴 신라 공무원들의 당황이 읽힌다. 도대체 얼마나 큰 금액, 재산이 걸려 있었을까.
기어코 담당 관청은 문서 보관소를 뒤져 선대왕들인 실성왕(夫智王-부지왕)과 내물왕(乃智王-신지왕)이 관련 분쟁을 판결하는 데 쓰일 교(敎. 일종의 명령 혹은 법률)를 내린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교(敎)를 검토한 신라 조정은 절거리의 주장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절거리가 재산을 갖는다". 판결에는 '별교'(別敎)라고 하는 부대조항도 달렸다. "절거리가 먼저 죽으면 그의 재산은 사노에게 상속된다"고 판시했다. 사노는 절거리의 자식 혹은 아우이다.
비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정은 아예 이번 분쟁에 대한 재론의 여지조차 없애놓았다. 판결 내용을 진마이촌으로 옮겨 낭송한 뒤 판결에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시키기 위해 소를 잡아 하늘에 바치고, 비석으로 판결 내용을 새기며 "다시 말썽을 일으키면 중죄를 주겠다"고 선언해 두었다. 게다가 이 판결, 실명제다. 공론에 참여했던 자들은 모두 그 실명이 적혀 있는데, 참여한 7명이 모두 ‘왕(王)’이다. 후면에는 마을 이장 2명과 중앙정부의 전사인 7명도 실명을 적어두었다. 최소 장관급 이상이 의논한, 당대로선 엄청난 재산 분쟁이었음을 알려준다. 물론 여러 해석상의 문제를 안고 있는 이야기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이와 일치한다.
2009년, 포항 공사판에서 신라비 하나가 더 발견된다. 냉수리비 발견지에서 약 8km 떨어진 곳, 지금의 한동대 근처인 중성리에서 발견된 비석에도 위와 비슷하게 ‘판례’를 기록해 놓았다. 과거에 모단벌(인명으로 추정)의 것 (재물)을 다른 사람이 빼앗았는데, 그 진상을 조사하여 진실을 밝혀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며 ,향후 이에 대한 재론을 못하도록 한다는 평결내용이 적혀 있다. 앞서 본 냉수리 비석과 비슷한 내용이지만 최고위직은 등장하지 않고, 판결을 내린 사람의 수도 적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신라의 정치 체계와는 다른, 새로운 위치의 벼슬들이 보이며, 아무리 연대를 높게 잡아도 서기 501년, 혹은 서기 441년 제작된 것으로 판단될 만큼 아주 오래된 비석이라는 점은 중성리 신라비석이 가지는 높은 가치를 설명해준다. 이에 발맞추어 올해 2월, 국보로의 승격이 예정된 상황이다. 
지증왕은 마지막 마립간이자 한국에서 첫 번째 시호를 받은 왕이기도 하다. 사실 국호인 ‘신라’를 정한 왕이 지증왕이다. 수많은 개혁을 이루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다툼을 해결했을 것이다. 냉수리비와 중성리비에는 신라 국가 형성 과정에서 중앙 권력이 지방으로 침투되면서 곳곳에서 벌어진 여러 일들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런 일을 담고 있는 비석이 포항에서 발견된 점은 포항이 고대 신라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짐작하게 해준다. 아마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포항지역의 토후들이 하나 둘씩 합쳐졌야 했기에 다른 지역보다 많은 문제가 생겼고, 이를 조금씩 해결해나가며 이를 돌에 새겨 남겼을 것이다.

향토사학자 황인  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