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조들이 즐기던 술 이야기
옛 선조들이 즐기던 술 이야기
  • 최태선 기자
  • 승인 2015.03.0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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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면 새학년, 새학기가 시작한다. 신입생, 동기, 선배들과 함께 이번 학기도 열심히 생활하자는 의미에서 다양한 술자리가 생긴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어색함을 덜기 위해, 사람들 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 좋은 일을 기념하기 위해, 슬픈 일을 위로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 언제부턴가 술은 우리의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이러한 술은 언제부터 마셨을까?
술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 중 하나가 원숭이를 보고 배웠다는 설이다. 원숭이가 먹다 버린 과일을 며칠 후에 다시 주워 먹는 것을 보았는데 원숭이가 기분이 좋아져 뛰어노는 것을 보고 발효의 원리를 배웠다는 것이다. 한반도를 살펴보면 술의 역사는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석기 시대의 유명한 빗살무늬 토기에는 고대의 술 문화를 가늠할 만한 요소가 있다. 토기의 빗금은 비와 햇살, 바람 등을 나타내었는데 모두 발효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연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발효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정립된 후에는 미인주 형태의 술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미인주는 누룩을 사용하지 않던 시기에 쌀이나 밥을 이용하여 당화과정을 입속의 침을 통해 인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여인들이 밥을 씹어 뱉어낸 것에 물을 넣고 토기에 담아 발효를 진행했던 것이 누룩이 개발되기 전의 초기의 술의 형태였다.
술에 대한 기록은 선사시대에 이어 삼국시대에도 남아있다. 부여, 진한, 마한, 고구려의 제천행사에서 ‘주야음주가무’ 하였다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이 있다. 당시 고구려는 발효의 나라라 불릴 만큼 훌륭한 술과 앞선 장 담그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제천행사에는 술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당시에 술이 신과 인간의 소통을 위한 신성한 제물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지 동이전에도 고구려 사람은 발효를 잘한다고 기록돼있고, 송나라 때 이방이 편찬한 태평어람에는 곡아주가 고구려에서 유래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는 고구려에서 빚은 곡아주를 통하여 술을 교역의 중심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고려 시대에 국가 행사로 치러진 대규모의 불교행사 팔관회에도 술이 등장한다. 술 빚는 기술이 발달하고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나라의 행사나 잔치에 쓰일 술을 빚는 대규모 양조장이 출연했다. 이때 대규모 양조장의 역할을 하던 것이 다름 아닌 고려 시대 사원이었다. 불교가 발달하면서 각종 사원이 생겨났고 비교적 쉽게 노동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말 사원장원이 발달했을 때는 전국의 유명사찰마다 대규모 양조장이 존재했고 많은 사찰에서 누룩을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한편, 술이 계속해서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증류식 소주가 등장하면서 공식적으로 빚어오던 양조형태의 술이 집집마다 소량의 술을 빚는 가양주 형태로 바뀌었다. 당시의 소주는 지금과 같이 희석식 소주가 아닌 증류식 소주였다. 이는 많은 양의 곡물을 필요로 했다. 술에 대한 폐해를 지적하는 상소와 곡식 부족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자 제사를 위해서나 손님을 맞을 때만 술을 내도록 하고 원칙적으로 술을 금하는 금주령이 내려졌다. 일제강점기에도 술에 대한 억압은 계속됐다. 1909년 일제는 주류에 조세를 부과하기 위해 주세법을 발표하고 집에서 술을 빚는 것을 금하면서 가양주 문화는 일시적으로 단절됐다가 1980년대 이후부터 술에 대한 불합리한 규제와 제약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예나 오늘이나 술은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다만 과하면 아니한 것보다 못한 법이다. 대학생들에게 술자리가 많은 3월, 술의 역사를 알면서 슬기롭게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