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포항, 이 땅에서 (1) : 포항 고인돌
문화 - 포항, 이 땅에서 (1) : 포항 고인돌
  • 김상수 기자
  • 승인 2015.03.04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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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고대 문화의 증거, 포항 고인돌
포항에는 문화가 없다고 단언하는 모두에게 묻는다. 우리가 사는 곳, 어디까지 아는가? 분명 포항은 교과서나 상식에 자주 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포항에도 수많은 문화재가 관심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학기 포항공대신문은 ABC 강의인 <지역문화탐방> 콘텐츠를 기반으로 포항의 숨겨진 문화를 조망하는 <포항, 이 땅에서> 문화 연재를 진행한다.                                                      <편집자 주>
다 안다. 삼국시대는 언제나 국사 시험 단골 소재가 아니던가. 누구나 ‘구석기’ ‘신석기’ ‘고조선’ ‘삼국시대’ 순으로 달달 외워 온 한국사다. 그럼 초점을 시간이 아닌 공간으로 바꾸자.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포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생각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포항은 동해안에서 가장 찬란했던 고대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과 암각화의 분포를 봄으로서 고대 포항의 입지를 알 수 있다. 서해안의 화순, 강화도가 고인돌로 유명하지만, 포항에는 108군집 462개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어(2012년에는 432기) 고인돌 문화축제를 여는 강화도보다 많다. 또한, 각각의 고인돌들의 특성이 매우 뚜렷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북방식 고인돌이 아니라 남방식이나 개석식 고인돌이다. 이 지역 특유의 강력한 정치체계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성계리에는 7기의 고인돌이 있다. 원래 마을 이름이 `칠성동`, 고인돌을 `칠성바위`라고 부를 정도로 신성시되어와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성계리 고인돌 중에는 세워 둔 고인돌도 있으며 이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기도 하다. 굄돌의 크기만 해도 일반 고인돌 크기이다. 해안가인 강사리에는 영일만 남쪽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 있는데, 높이가 3m가 넘는다. 이밖에도 인비리, 칠성리, 성곡리 등 고인돌이 정말 많다.
포항 고인돌은 암각화와 함께 발굴되는 경우가 많다. 칠포리와 신흥리에는 바닷가 근처 3곳의 암각화 유적이 있다. 칠포리 곤륜산에서 발견된 암각화는 1989년부터 1994년까지 계속해서 암각화가 추가로 발견되고 있다. 이곳의 암각화는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문양을 그리고 있다. 방패형 혹은 인면형 암각화라고 불린다. 또한, 성혈(구멍)이 새겨진 고인돌도 같은 곳에 있다. 특이하게도 성혈을 판 뒤 돌을 파 연결했다. 별자리, 혹은 고인돌 축조 집단의 규모를 나타내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 신흥리에서 발견된 오줌바위암각화에는 윷판형, 고누판, 그리고 기하학적인 다양한 모양들이 그려져 있는데, 특히 별자리들이 많이 그려져 있어 석기시대의 천문관측유적으로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고인돌의 축조를 위해서는 거대한 바위를 캐내 운반해야 한다. 무겁게는 수십 t에 이르는 거석을 채석해야 하고, 또 간돌검이나 청동검 등의 여러 부장품을 묻어야 한다. 고인돌과 암각화는 경북 동해안, 특히 포항 연일만 지역에 큰 정치권력 집단이 있었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한반도 북부 지역의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유·이민들이 동해안을 따라 내려왔고, 이들이 선주민들과 더불어 여러 소국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고인돌을 축조해 조상의 무덤으로, 또 농경지 영역의 표지로서 사용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진한의 12소국의 명칭이 나오는데, 12소국은 중 영일만 일대에 근기국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근기국은 신라의 건국(B.C 57) 이전인 기원전 2세기 초에서 1세기 말경, 영일만 일대에 소국을 형성하고 군림했다. 그리고 흥해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에도 다벌국, 기계 지역의 초팔국 등 12국으로 표현되지 않은 소국들도 있었다. 이렇게 고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포항은 고인돌 왕국이었다. 청동기시대에 이미 지배계급, 더 나아가 소국이 형성 되어 있었고 이 소국들이 모여 연맹체를,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를 형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구가 어렵고, 무엇보다 지역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정확한 역사는 아직 베일에 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