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올릴 기억이 많다는 것은 행복한 일”
“떠올릴 기억이 많다는 것은 행복한 일”
  • 고유상(화학 88) /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 승인 2006.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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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홈커밍데이를 다녀와서
“20년이 흐른 지금 POSTECH은 예전처럼 외롭지도 작지도 않은 초우량 대학으로 성장 … 종종 지면을 장식하는 우수한 연구성과들을 접할 때면, 예외적인 특별한 성과라기보다는 실력에
무언가를 생각할 때 막연한 설레임이 이는 때가 있다. 대개는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추억이나 삶에 큰 영향을 준 대상과 관련이 있기 마련이다. 내게 POSTECH이란 이름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떠올릴 기억이 많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POSTECH이 벌써 개교 20주년을 맞아 20주년 기념 홈커밍데이 행사를 연다. 아침 일곱시 기차에 맞추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알람시계 바늘을 앞으로 좀 더 돌려놓아야 했다. 그러나 시계가 울리기도 전에 이미 깨어있는 나를 발견한다. 서울역 플랫폼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들이 반긴다. 요즘은 동문 모임에 나가면 모르는 얼굴들이 더 많다. 대부분은 이제 후배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처음 보는 후배들과 바로 친근하게 대화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동문이라는 유대감이 아닐까?
포항으로 내려가는 새마을호 열차 안에서 몇 가지 간단한 게임도 하고, 서로 소개도 하다 보니 어느덧 효자역에 도착한다. 마침 도착과 함께 경음악대의 경쾌한 환영곡이 반겨준다. 마음이 조금은 우쭐해지는 느낌도 든다. 교정에 들어서니 울창한 나무숲이 유난히 싱그럽다. 아! 우리학교가 이렇게 아름답구나. 누군가가 옆에서 그런다. 다시 학교에 다닌다면 공부 열심히 할 것 같다고. 마음속으로 대꾸해 본다. ‘실은 내 마음도 그래.’ 하늘도 맑고, 참 아름다운 날이다.
준비를 많이 했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든다. 전문 이벤트 회사를 통해 진행되는 각각의 행사들이 물 흐르듯 순조롭게 진행된다. 아이들을 위해 놀이 기구를 별도로 준비하고, 짧은 시간에 맞추기 위해 교내 수송을 위한 버스까지 마련하는 등 세세한 대비가 눈에 띈다. 한편으론 학교에서 준비한 것에 비해 동문의 참여가 좀 부족하다는 아쉬움도 있다. 어떤 순간에는 동문들보다 행사 진행자가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차, 동문숫자가 원래 적었지….
문득 처음 학교 들어갔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수업을 받기 위해 ‘폭풍의 언덕’ 이라고도 불리는 78계단을 올라 강의동으로 걸어가는 동안 문득 주위를 둘러보고는 넓은 캠퍼스에 나 혼자 서 있음을 느꼈던 경험 말이다. 지곡회관에는 학생들보다 직원 또는 외부인들이 더 많은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만큼 초창기의 POSTECH에 다닌다는 것은 조금은 외로운 일이었던 것 같다. 학교 당국도 지방에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주변의 우려를 딛고 최고의 학교로 정착시키기 위한 고심이 심했으리라.
그러나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 만은 않았다. 20년이 흐른 지금 POSTECH은 예전처럼 외롭지도, 작지도 않은 초우량 대학으로 성장했다. 못 보던 건물들도 많아졌고, 지금도 몇 개는 건설 중에 있는 것이 보인다. 늘어난 것이 비단 건물들만은 아닐 것이다. 종종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POSTECH의 우수한 연구성과들을 접할 때면, 예외적인 특별한 성과라기보다는 실력에 바탕을 둔 자연스런 결과라는 느낌이 강하다. 선진 대학행정 및 운영시스템은 지금도 국내 각 대학의 집중적인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동문들도 사회 각계에서 높은 성과를 창출하며 그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후배들과 옛 추억을 오랜만에 떠올려 본다. 누군가 한마디 하란다. “지금은 내가 여러분에게 까마득한 선배로 보이겠지만,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모두가 POSTECH의 초창기 대 선배가 된다.” 그래, 정말 앞으로 갈 길이 더 멀다!
어두운 차창 밖으로 도시의 불빛들이 뒷걸음치며 손을 흔든다. 교수님들을 많이 뵙지 못하고 돌아오는 것이 못내 아쉬운 내 마음을 아는 듯하다. 가족 한마당 체육대회를 통해 즐겁고 하나가 된 감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만큼 교수님들을 찾아뵙고 또 오랜만에 교정과 실험실들을 둘러볼 시간이 부족했다. 잠시 틈을 내 인사를 하러 들린 은사님들도 자리에 계시지 않아 아쉬웠다. 인사도 못 올리고 돌아오게 되어 죄송한 마음이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니 누군가 홈커밍데이 행사에 관심을 보인다. 신문에서 읽었다며 동문 참석률이 얼마냐고 묻는다. 학부만 친다면 10% 정도는 될 것 같다. 대학원까지 합치면 5% 정도 될까. 그가 깜작 놀란다. 자기 모교는 그런 행사에 참석률이 0.1%도 안 될 것이라고 한다. 자기도 그런 행사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참 그렇지! 우리 동문들은 학교에 대한 관심이 다른 학교 출신보다는 열배는 더 높은 것이다. 행사를 준비한 학교당국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혹시 기획했던 것 보다 참석이 저조했다고 실망하지 마시라는 말씀도 드리고 싶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동문들이 마음 속 깊이 떠나온 모교를 그리워하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