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타령’을 허용하라!
‘사랑타령’을 허용하라!
  • 차원현 / 국어교육과 강의교수
  • 승인 2014.11.19 1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 - 포스테키안에게 권하는 소설 (5) L.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톨스토이가 쓴 소설 이름이다. 이 소설은 신의 명령에 따라 한 산모(産母)의 영혼을 취하러 내려온 천사 미하엘이 명령에 불복, 지상으로 추방당한 뒤 인간에 관한 비밀 세 가지를 풀고 난 후 천상으로 복귀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인간에 관한 비밀 세 가지 중 가장 중요한 마지막 비밀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톨스토이의 대답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인간에 고유한 질병이었다. 그것은 신의 질서, 조화롭지만 동시에 빈틈없이 작동하는 냉정한 우주의 질서를 거슬러 인간 공동체가 고안해 낸 사회적 연대의 다른 이름이었다.
천사 미하엘이 인간의 사랑을 알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그는 천사였기 때문에 신이 만든 냉정한 자연 질서 아래서 산모가 죽으면 아이 역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추위에 얼거나 굶어서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산모의 영혼을 취하는 순간 아이도 죽을 것이기 때문에 미하엘은 신의 명령에 불복하지만, 막상 지상으로 추방당한 후 그가 확인한 진실은 달랐다. 인간은 신적 질서와는 다른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한 동물이었다. 그들은 공동체를 만들어 당연히 굶고 얼어서 죽었어야 할 아이들을 살려냈다. 양육하고 교육하여 훌륭한 청년, 늠름한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 길러낸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랑’은 냉혹한 신의 질서를 거스르는 역신(逆神)의 고안물이었고, 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지의 피부병에 불과한 인간 공동체의 중심 엔진, 사회적 연대의 매체였던 것이다.
21세기적인 사랑의 전형을 유포시키고 있다고 평가되는 할리우드산 멜로물에서 사랑은 항용 ‘양성 혹은 동성 사이의 성적 교환’ 또는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분배’정도로만 묘사된다. 이들은 사랑을 생물학적 수준에서 흔히 이해하고 묘사한다. 전적으로 틀린 이해는 아니지만, 사랑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섹슈얼리티라는 생물학적 차원, 연애라는 일상의 차원, 결혼이라는 제도적 차원이 정서로서의 사랑을 에워싸고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사랑’이나 ‘연애’는 남다른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 둘은 섹슈얼리티나 결혼처럼 단단한 실증적 사실, 잘 고안된 건축물이 아니다. 사랑과 연애는 흐리멍덩하고 규정하기 힘든, 유동적인 감정이고 우연한 사건이다. 누구도 합리적 계획 하에 사랑하거나 프로그램에 따라서 연애를 하지는 않는다. 사랑과 연애에는 확실한 사실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실체 없는 사랑, 연애가 없다거나 혹은 그것의 진정성이란 차원이 없다고 생각해 보자. 섹슈얼리티는 제대로 넘쳐흘러 홍수를 이룰 것이며, 결혼은 ‘양성 간의 성적 교환을 제도화하는 사회적 거래’ 이상이 되기 힘들 것이다. 21세기도 어느덧 15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저런 성의 범람과 잘 포장된 거래로서의 혼인이지 않은가. 생물학적 섹슈얼리티의 범람에 방파제를 쌓고 그것을 인간화하는 일, 이른바 사랑에 관한 문화적 건축물들을 쌓아올리는 일과, 결혼이라는 ‘양성간의 성적 교환의 제도화된 장치’가 극적으로 실정화되어 ‘메마른 인신 거래’로 전락하지 않도록 거래될 수 없는 정서와 일상의 교제를 중간에 끼워 넣는 일은 저 흐리멍덩한 사랑과 연애 따위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인간에 고유한 활동으로 사랑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도, 정치도, 예술도 있다. 그러나 과학이나 정치, 예술에 문외한인 이른바 저잣거리의 저 이름 없는 개인들, 21세기의 냉혹한 시장에 의해 때로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저 흐리멍덩한 개인들이 툭하면 사랑 타령을 해대는 이유는 그것만이 그들에게 허용된, 인간으로서 자신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유일한 혹은 거의 유일한 삶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톨스토이의 신이나 21세기의 시장의 명석함이 꿰뚫기에는 너무 흐리멍덩한 영역이고 단정한 시장의 질서가 상대하기엔 지나치게 복잡한, 골치 아픈 물건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건 확고한 사실성이 없는, 그래서 만사가 흐리멍덩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고안물이기 때문이다.
상처 입은 21세기의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여전히 사랑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약간은 말랑말랑하고, 가볍거나 유치하며 덜 심각한 것이어도 좋을 것 같다. 삶의 피로와 우울이 21세기판 새 비극의 주인공으로 우리를 초대하기 전에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 상처 입은 자들을 보듬어 안는 따뜻한 공동체를 일구어낼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