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충성 : 자기 부식과 확산
과잉충성 : 자기 부식과 확산
  • 김현호 기자
  • 승인 2014.11.0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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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바로 ‘망명’이다. 이는 정치적인 이유로 박해를 받거나 그럴 위험이 있는 사람이 외국으로 몸을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이 망명이라는 단어가 그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그것도 혼자가 아닌 ‘사이버’라는 단어와 함께 말이다. ‘사이버 망명’이란 단어는 지난 9월부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부의 카카오톡 검열이 이슈화되면서 사람들이 사이버 망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한 의원은 “검찰이 과잉충성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비판의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는 아직도 뜨거운 감자로서 그 열기가 식지 않고 국민들을 붉히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일어난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다양한 곳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대표적으로는 ‘과잉충성’을 들 수 있다. 과잉충성은 간단히 말해 ‘극단적인 충성’이라 볼 수 있다. 이는 과유불급의 전형적인 사례로, 개인과 집단에 큰 피해를 준다. 개인은 무너지고 집단 역시 무너진 개인들로 인해 그 형태를 잃는다. 그 피해는 확연히 눈에 드러난다.
개인에게 가해지는 피해로는 ‘자기 부식’을 들 수 있다. 남이 아닌 자신으로 인해 자신이 부식되는 것이다. 과잉충성을 통해 자기 부식을 겪은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예로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요리를 들 수 있다. 요리는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합려’에게 지나친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전 왕의 아들이었던 ‘경기’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오른팔을 자르고 가족을 모두 죽인다. 이처럼 뼈와 살을 깎는 희생으로 그는 목적을 이루지만, 결국 자살을 택한다.
집단에 가해지는 피해 역시 자기 부식을 들 수 있다. 집단 내에서 한 개인이 과잉충성을 하면 충성경쟁이 시작된다. 결과가 어떻든 깊은 충성을 경험한 집단은 과열된 충성경쟁 양상을 보인다. 과잉충성의 확산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순간부터 어떠한 방식이든 충성이라는 명목으로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두려운 것은 무능력과 과잉충성의 결합이다. 무능력과 과잉충성이 결합하면 그 결과는 최악으로 흘러간다.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과잉충성이 결국에는 한 집단을 무너뜨릴 수 있다. 과잉충성의 확산, 그것은 곧 자기 부식의 확산을 의미한다.
과잉충성은 어느 집단에서든 발생할 수 있다. 그 시작은 개인적일 수도, 동시다발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필연적인 과잉충성의 피해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이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 보통 과잉충성으로 인한 폐해는 그 내막이 인의 장막으로 감춰진다. 충성으로부터 비롯된 폐해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집단은 그 내막을 알더라도 지도자는 이를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는 집단의 자기 부식을 가속할 뿐이다. 그저 간단한 피드백과 보고만으로도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문제점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과잉충성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