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운하와 제1회 포항운하축제
포항운하와 제1회 포항운하축제
  • 김상수 기자
  • 승인 2014.10.15 0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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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부활하는 동빈내항
‘포항에 웬 운하’ 포항운하를 처음 들었을 때의 반응은 아마 위와 같지 않을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포항은 이미 해안 도시인데 왜 운하가 필요하다는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포항의 역사 및 지리를 알아야 한다. 죽도시장 동쪽 외곽으로 발걸음을 조금 옮기면 바로 바다가 나온다. 동빈내항(현 포항구항) 덕분이다. 동해의 바닷물은 동빈내항을 통해 한반도와 깊숙이 접촉한 후 형산강으로 흘러들었고, 형산강을 통해 바다로 흘러나갔다. 동빈내항과 형산강이 이어져 있었기에 송도라는 동빈내항의 동쪽 땅이 비바람을 막아 주고 파도를 줄여 주어 이 과정에서 매우 좋은 항구가 형성됐다.
이렇게 형성된 항구는 포항을 발전시켰다. 포항은 1732년 포항창진(浦項倉鎭)이 설치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포항창진은 일종의 곡물창고로, 기근을 대비하는 역할을 했다. 포항은 바다를 통해 경상도 및 전라도의 곡물을 모을 수 있었고, 반대로 함경도까지도 곡물을 이송할 수 있었다. 형산강물이 바닷물과 섞이는 동빈내항은 겨울에도 쉽게 얼지 않기도 했다. 포구의 기능을 수행하기 좋다는 이유로 1870년에는 포항진을 설치해 수군 첨사(水軍 僉使)를 두기도 했다. 일종의 해안방어기지이다.
또 동해로 나가는 어업의 최대 길목이기도 했다. 1900년대 일본인들이 들어오며 근대 어업기술이 들어와 포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한다. 특히 정어리가 많이 잡혔는데 1937년에는 138만톤이 넘는 정어리가 잡히기도 했다. 슬프게도 이렇게 잡힌 정이리는 기름을 짜내어 군수용 기름으로 활용되었다. 하늘이 노했는지 1943년도에는 정어리 어획량이 0이 되고, 일제는 정어리를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오죽하면 정어리에게 일본을 망하게 한 생선이라는 의미의 ‘일망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
마지막으로 포스코가 제철소를 포항 영일만에 세우게 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동빈내항은 한계를 드러낸다. 나날이 늘어나는 수입 철강 원료를 소화하기에는 너무 작은 항구였던 것이다. 결국 지금의 포항 신항이 건설되고, 동빈내항은 어선과 일반적인 공산품을 실은 배만 하역하는 곳으로 바뀐다. 여기에 늘어나는 주택 수요를 해소하고 홍수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형산강 쪽의 물길 1.3km를 막아야 했다. 물이 고인 거대한 하수처리장이 되어 버린 동빈내항은 끔찍한 악취를 풍기며 썩어갔다.
이에 따라 포항에 형산강과 동빈내항을 운하로 다시 연결시켜 물길을 복원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된다. 박승호 전 포항시장은 공약 1호로 포항 운하를 내세웠다. 박승호 전 포항시장의 지휘 아래 2008년 동빈내항과 형산강의 물길을 다시 잇는 포항운하 건설 사업이 발표됐고, 500번이 넘는 설득 끝에 827가구 2천200여명이 이주를 결정했다. 단 한 사람의 강제집행도 없었다. 결국 2012년 5월, 포항운하가 착공되고 2013년 11월 2일을 기점으로 통수식을 가지며 40년 만에 물길이 열리게 된다. 운하라기보다 복원된 물길이다.
새로 착공된 포항 운하에 직접 찾아가 보았다. 제1회 포항운하축제를 진행 중이었던 포항 운하에는 꽤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10월 2일부터 10월 4일까지 진행된 포항 운하축제에는 매일 2000여 명이 넘는 사람이 왔고 이색 창작배 경연대회, 이색 창작배 경주대회, 방티 달리기(읍면동, 대학 대항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다. 이밖에도 관광객들이 참여하는 이벤트도 많았다. 10월 3일 찾은 포항 운하에서 처음 본 것도 관광객 참여 이벤트였다. 지정된 위치에서 “방티!” 라고 크게 소리치면 데시벨 측정기로 소리의 크기를 측정, 기준 이상의 데시벨이 나올 경우 방티(대야의 방언)를 선물로 주는 행사였다. ‘갯미기 방티타는 날’이라는 축제의 소제목처럼 방티는 정말 축제 끝까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왔다. 한편, 운하에서는 관람객들이 조금 후에 있을 ‘방티 달리기’를 체험하고 있었다. ‘방티 달리기 대회’는 물 위에서 대야를 타고 손으로 노를 저어 앞으로 가는 대회이다.
오후 4시부터 시작된 대학부 본선에는 우리대학 학생팀도 2 팀이 있었다. 이중 우리대학 학생팀 ‘오분컷’은 1예선을 통과해 결선에 진출했다. 노란색인 우리대학 방티는 초반에 빠른 속도로 1등으로 치고 나왔다. 하지만 뒤를 바짝 쫓았던 경주동국대가 우리대학을 금방 따라잡고, 격차가 난 상태 그대로 본선 1등을 거머쥐었다. 비록 2등이었지만 3위와의 격차도 꽤 많이 난 만큼 흥미진진한 경기였다. 3등은 경주대학교, 4등은 포항대학교팀이 차지했다. 
포항 운하 한 켠에서는 이색 배 전시가 있었다. 포항을 상징하는 디자인으로 재활용 자원을 70% 이용해야 한다는 조건이 걸려 있음에도 출품작들은 매우 다양했다. 포항의 해병대 모자를 형상화한 배나 과메기를 형상화한 배는 특히 많은 눈길을 받았으며 그밖에도 우유곽으로 만든 거북선(대흥초등학교 학생들이 제작한 대흥호), KTX 형상화 배 등 다양한 작품들이 있었다.
다음날 다시 찾아간 포항운하축제에서는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방티 달리기 대화 읍면동 예선, 본선 때문이었다. 해도동 주민들은 플랜카드까지 2개를 가지고 나와 응원을 펼쳤고 그 밖에도 많은 지역이 꽹과리나 징을 가지고 와 열띤 응원전을 벌였다. 어제보다 강해진 바람에 조기 탈락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경기 시작 후 물에 빠지면 실격이기 때문이다. 물이 차가워 노 젓는 손이 시릴 텐데도 추위를 모르는 듯한 열정으로 노를 젓는 사람과 출전한 주민의 방티를 조금씩 앞서가며 신나게 응원을 펼치는 모습에 자신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보였다.
조용히 흐르는 바닷물이 아주 깨끗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인 포항운하축제의 느낌은 조용한 가운데서도 소소한 재미가 보였다. 맑은 날씨 때문인지 하늘이 맑아 포스코까지 함께 보이는 전경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고, 요란한 건 없어도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다. 가족 단위로 오기에 참 좋은 축제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돗자리를 펴고 경기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문제였던 것은 주변 상태인데, 주변에 큰 상권이 형성돼 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토지주택공사가 포항운하 주변의 땅(상업용지)을 입찰한 결과 3만3천여㎡ 가운데 겨우 6%만 매각됐다. 이 6%도 상업용지의 일괄매각이 아니라 개별 매수자만 매수를 했을 뿐이다. 비록 운하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전체적인 주변 환경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라 많이 투자한 만큼의 수익을 내야 하는 상업용지 ‘일괄’매각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번번이 실패하는 가운데, 개별 매수자 입찰에서만 4개의 땅이 매각됐다. 또한 포장마차들이 많이 몰려와 알짜 자리를 다 차지해버려 아쉬움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정도 되는 즐거운 축제가 인터넷이나 기타 매체를 통한 홍보가 적어 정보를 모으기 어려웠다는 점이 매우 안타까웠다. 지역 관광객들을 제외한 외부 관광객을 끌어들일 만한 홍보가  거의 없다 보니 지역 주민만의 축제가 되어 버린 듯 한 아쉬움을 느꼈다.
땅 속에서 다시 부활한 포항운하는 이미 동빈내항의 오염 문제를 해결해냈다. 해양경북의 거점도시를 표방하는 포항으로서는 포항운하, 해양공원, 죽도시장, 송도, 영일대해수욕장를 연계해 ‘힐링 벨트’를 형성해 관광산업을 육성시킬 생각이다. 내년에는 7~8월에 포항 운하 축제를 개최할 예정이 한다. 앞으로 포항운하는 어떻게 발전할지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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