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목’의 상상력을 통한 트라우마 치유와 신뢰 회복
‘접목’의 상상력을 통한 트라우마 치유와 신뢰 회복
  • 노승욱 / 인문 대우교수
  • 승인 2014.09.25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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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포스테키안에게 권하는 소설 (2) 황순원의 『인간접목』
황순원(1915~2000)의 장편소설 『인간접목(人間接木)』(문학과지성사, 1990)은 세월호 참사에서 촉발된 우리사회의 트라우마와 불신의 문제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큰 소설이다. 1957년에 첫 출간된 이 소설은 6ㆍ25 동란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으면서 극도의 상호 불신에 빠져버린 우리민족의 치유와 신뢰 회복을 핵심적인 주제로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 소설은 어른과 청소년 간에 발생하고 있는 세대 간 불신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후 우리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부정직하고 무능한 기성세대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불신이라고 할 때, 『인간접목』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는 중요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고 있는 소년원은 교사들과 아이들 간에 불신과 선입견이 팽배하게 가득찬 곳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상이군인 출신 교사 최종호는 소년원의 전쟁고아들을 자신이 일방적으로 교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상이군인인 자신과 고아인 아이들이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보완적 존재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그는 아이들을 현재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아이들에게 신뢰와 책임 등과 같은 긍정적 가치의 인식을 일깨워주고자 노력한다. 소년들의 대장격인 짱구대가리가 아이들을 선동해 소년원의 창고를 털었을 때 오히려 짱구대가리에게 창고의 관리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자신들을 믿고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종호에게 짱구대가리는 점차적으로 신뢰를 갖게 된다. 그것은 종호가 한번 했던 약속을 지키고자 진심으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종호가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길 때마다 짱구대가리의 마음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종호에 대한 믿음이 싹튼 짱구대가리는 종호와 했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거지 왕초의 지시를 받고 자신을 따르던 아이들과 함께 소년원을 탈출하려고 시도할 때 야경대원 누구에게도 폭력을 가하지 않은 것은 종호와 했던 약속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을 허물고 신뢰를 쌓아가던 종호와 짱구대가리는 마지막 시험과도 같은 상황에 처해지게 된다. 종호는 거지 왕초의 지시를 받고 밤중에 탈출을 시도하던 짱구대가리 일행과 맞닥뜨린다. 그는 짱구대가리 일행의 탈출을 만류하면서 만일 나가고 싶다면 내일 낮에 대문으로 내보내 주겠다고 약속한다. 종호와 짱구대가리는 서로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약속을 나눈다. 종호가 지켜야할 약속은 짱구대가리 일행을 아무런 조건 없이 내일 낮에 소년원에서 내보내 주겠다는 것이고, 짱구대가리가 지켜야할 약속은 내일 낮에 대문으로 나가기까지는 소년원을 탈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종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년원 교사직을 내걸어야 했고, 짱구대가리는 거지 왕초의 보복을 무릅써야 했다.
결국 짱구대가리는 종호와의 약속을 이행하다 자신이 충성하며 따르던 왕초의 칼에 찔리고 만다. 그렇지만 옆구리를 칼에 찔린 짱구대가리는 자신을 등에 업은 종호에게 “선생님, 정말 고마워요.”라고 말한다. 종호에 대한 짱구대가리의 고마움은 불신을 받던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스승에 대한 진심어린 감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불신으로 가득차 있던 전후사회에서 서로를 인격적 존재로 인정하면서 자신이 했던 약속을 충실히 지켜나가는 것이 허물어진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첩경이자 정도임을 보여주고 있다.
황순원은 이 소설에서 식물재배의 방법론인 ‘접목’의 발상을 통해 전후사회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무너져 내린 신뢰를 회복하고자 했다. 상호 이질적인 두 나무가 접붙임을 통해 하나의 생명체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만 한다. 이 소설에서 외과의사였던 최종호가 소년원의 교사로서 새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나, 천대 받던 전쟁고아들이 어린이 본연의 순수성을 회복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자기중심적 사고와 상대방에 대한 편견을 함께 내려놓음으로써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황순원의 『인간접목』은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찾아온 전국민적 트라우마와 상호 불신의 상황 속에서 ‘접목’의 혜안을 다시금 보여주고 있다. 특히 기성세대나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일수록 더욱 솔선수범해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희생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상대방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만이 선실에서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을 철석같이 믿고 구조를 기다리다 꽃다운 목숨을 잃은 어린 영혼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