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소통의 길을 찾는 문학의 발자취
진정한 소통의 길을 찾는 문학의 발자취
  • 박상준 / 인문 교수
  • 승인 2014.09.0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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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포스테키안에게 권하는 소설 (1) 『어둠의 왼손』
어슐러 르 귄(1929~)은 생존하는 최고의 SF 작가이다. 스웨덴 아카데미가 본격문학/대중문학의 이분법에서 자유로웠다면 노벨문학상이 주어져도 한참 전에 주어졌을 만한 작가이다. 1969년에 발표된 『어둠의 왼손』(시공사, 2002)만으로도 그녀는 그럴 만한 지위를 획득했다. 『어둠의 왼손』은 ‘사람들은 어떻게 교류(해야)하는가’라는 본원적인 문제를 유연하게 탐구함으로써 인류 문화에 대한 문학의 기여를 도탑게 해 주었다.
행성 겨울의 왕국 카르하이드의 총리대신이었던 ‘에스트라벤’과 우주 연합체인 에큐멘의 엔보이[사절]로 행성 겨울을 찾아온 지구인 ‘겐리 아리’ 사이의 교류가 소설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에큐멘에 행성 겨울도 합류하여 서로 교류를 갖자는 제안을 안고 온 ‘겐리 아이’와, 그의 존재 자체를 믿을 수 없는 게센인들 사이에서 확인되는 여러 가지 차이들, 이 차이를 살펴가면서 존재들 간의 소통, 교류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해 생각게 하는 작품이다. 이 부분이 소설의 육체를 이룬다. ‘겐리 아이’를 신뢰하고 그가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려다 반역자로 몰려 카르하이드에서 추방되는 ‘에스트라벤’과, 마찬가지로 추방되어 오르고린으로 넘어갔다가 끝내 포로수용소에 갇혀 죽음을 바라보게 되는 ‘겐리 아이’의 행적, 수용소에 갇힌 ‘겐리 아이’를 ‘에스트라벤’이 구해내서 둘이 함께 빙하지대를 통과하고 끝내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이야기가 소설의 뼈대를 이룬다.
SF소설 일반이 주는 장르적인 재미가 전편에 흐르지만, 이 작품을 읽기는 그다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런저런 의미를 단정적으로 규정해 내는 경우가 별로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여기서 보이는 의미의 불명료성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치를 보증해 주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탐구하는 존재 사이의 소통이라는 것이, 하나의 주관이 사태를 정리하듯 명료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소통이라는 것은 상호주관적인 것이어서 미묘하기 그지없을 때가 적지 않다. 이 문제를 『어둠의 왼손』은, 지구인과 게센인이라는 우주의 서로 다른 종족 사이에 설정하고 있다. 문화적 격차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우주의 두 종족 사이에서 소통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서로 대단히 이질적인 까닭에 상대편 문화의 특성들에 대한 명확한 해명 같은 것은 애초부터 가능치 않을 수도 있다. 작가 역시 이런 점에 정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그 결과로, 예를 들어, 카르하이드인들이 중시하는 ‘시프그레셔’ 등에 대해서 규정적인 이해를 기대하기는 난망하다.
더 나아가서 게센인들은 남녀 동성인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수태가 가능한 시기 곧 ‘케머’ 기간에만 어느 한쪽 성으로 변환될 뿐 그 외의 기간은 양성적인 존재로 기능하는 종족이다. 이들이 보기에 남성인 지구인 ‘겐리 아이’는 평생 케머기[발정기]에 들어 있는 변태성욕자로 규정되며, 반대로, 남성인 ‘아이’는 자기 주변에 있는 게센인들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성 정체성이나 성차 등을 포괄하는 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작품이 보여 주는 이런저런 상념들은 주목할 만한 것이지만, 이 경우에도 의미 있는 것은 질문들뿐이다. 애초부터 특정한 답이나 고정된 시선을 마련하고 있지도 않은 까닭이다(해서 이 작품을 페미니즘 소설로 읽는 일부의 견해는 그 의미를 부당하게 축소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심하게 왜곡하는 것이기도 하다).
명확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실상 하나도 없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에스트라벤’과 ‘겐리 아이’의 관계를 통해서, 존재들 간에 진정한 소통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며, 무엇을 요구하는지 등을 숙고하게 만들어 주는 까닭이다. 진정한 소통은 맹목적인 신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맹목적인 신뢰나 헌신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 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복종 혹은 피지배의 자리에 있는 자의 기만적 자기 위안에 불과할 듯도 싶다. 존재들 간의 진정한 소통은, 관계에 대한 소망·욕망이 전제된 다음에, 그를 이루기 위한 상호간의 탐색 및 탐색이 내포하게 마련인 회의와 의심 그리고 이런 의구심에 따르는 불안 등을 견뎌내는 끊임없는 인내와 헌신 위에서야 그 가능성을 갖는 것이라고 『어둠의 왼손』은 말해 준다. 상호 소통이라는 밝음, 오른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회의와 의심, 인내라는 어둠, 왼손이 또한 존재해야 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