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실존의 문제이다
기억은 실존의 문제이다
  • 조한 / 홍익대 건축대학 교수
  • 승인 2014.06.04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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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찾았다. 지하철을 빠져나오니 번쩍거리는 금속의 곡면이 거대한 분지를 이루고 나를 맞이한다. 동대문 앞을 지나던 그 많던 버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묘한 고요함 속에 구불구불한 곡면에 이끌려 내부 공간으로 들어간다. 그곳엔 전혀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새하얗다 못해 눈비시기까지 한 내부 공간엔 기둥도 없고 벽도 없다. 물 흐르듯이 벽에서 천정으로, 다시 천정에서 벽으로 이어지며, 창이 거의 없는 공간을 따라 움직이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여기가 1층인지 2층인지 알 수 없다. 어떠한 용도의 공간인지, 어떤 프로그램의 공간인지도 알 수 없다. 하얀 공간에 몸을 맡기고 부유하고 있으니 영화 ‘그래비티(Gravity, 2013)’가 떠오른다. 우주 공간에 떠있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궁극의 자유로움을 느껴보려 하지만, 어느새 그 자유로움은 알 수 없는 불편함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의 몸은 어디인가 정주할 곳을 찾지만 DDP는 끊임없이 움직임만 강요한다.
급기야 그 불편함을 벗어나고자 안내판을 따라 ‘둘레길’을 찾아가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둘레길’이라 명명된 새하얀 경사로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감은 빈 공간을 터덜터덜 울리는 퉁명스런 내 발 소리뿐이다. 그 옛날 아버지와 함께 처음 왔던 동대문야구장의 흙냄새와 아직 길들이지 않는 새 야구 글러브의 미끈한 촉감, 또한 버려진 동대문축구장에 자리 잡았던 풍물시장의 정겨운 빛깔과 지글지글 소리마저 맛있는 빈대떡의 맛도 이곳엔 더 이상 없다. 내 몸의 감각 하나하나는 동대문운동장의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려 하지만 이 공간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아무런 향과 맛이 없는 공간 속에서 나는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것 같다. 내려가는 길에 구입한 커피에서조차 아무런 향과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 마다 내 몸의 감각을 하나 둘 잃어가고 심지어 나 자신을 잃어가는 느낌이다. 다시 밖에 나오니 빵빵거리는 차 소리와 재잘거리는 사람들 소리가 나를 맞이한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제야 나를 다시 찾은 것 같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우리가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로써 실존한다고 한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며, 세계가 없다면 우리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지각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Perception, 1945/2009)>에서 우리가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하나의 물체로써)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공간과 시간은 관념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통해 체화되는 것이라 한다. 철학자 박영욱은 <필로아키텍쳐: 현대건축과 공간 그리고 철학적 담론(2009)>에서 공간이란 미리 앞서 존재하는 어떤 공간이 아니라 우리 몸의 체화되는 양태이자 동시에 우리의 지각이 활성화되는 장소라고 한다. 최근 인지과학과 진화심리학에 의하면, 우리는 주변 환경에 가까스로 적응하며 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감을 통해 적극적으로 우리만의 체화된 시공간을 구축하며 사는 능동적인 존재라고 한다.
‘기억의 장소’가 소중한 것은 거창한 이데올로기나 특정한 미학이론 때문이 아니고, 그 기억 하나하나가 우리의 생존/실존을 위해 필수적인 각자의 체화된 시공간을 형성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DDP가 그토록 불편한 이유는, 주변 문맥과 형태적으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도 아니며, 엄청난 예산이 투입된 전형적인 전시행적의 표본이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건축가에 의해 디자인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DDP가 그토록 탈출하고픈 공간이었던 이유는, 우리 각자만의 체화된 시공간을 형성하기 위해 필수적인 어떠한 ‘장소의 기억’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어떠한 ‘기억의 감각’도 촉발시키지 못하는 이곳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갊을 느끼기 때문이다. ‘기억의 공간’이 없다면 ‘기억의 몸’인 우리 자신도 없다. 기억이 사라진 도시에서 우리는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 환자에 다름 아니다. 기억은 곧 실존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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