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감동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 조한 교수/ 홍익대 건축대학
  • 승인 2014.04.09 14: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건축적 감동의 원인은 무엇일까? 거대한 원형경기장의 규모? 그리스 신전이나 르네상스 교회의 입면에서 읽혀지는 비례감?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마지막 곡이기도 했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를 들으면 마치 인류와 하나 되는 것 같은 환희가 느껴지고, 드라마 ‘응답하라 1994’ 7화 ‘그해, 여름’의 오프닝 곡이었던, 듀스의 ‘여름 안에서’를 들으면 정말 두 팔을 벌려 푸른 하늘을 다 받아내는 것 같은 벅찬 감동이 느껴진다. 또한 영화 ‘트레인스포팅(1996)’에서 펑크락의 대부 이기팝의 경쾌한 ‘Lust For Life’와 함께 주인공 렌튼(이안 맥그리거)가 경찰을 피해 에딘버러 골목길을 달릴 때는 궁극의 자유로움이 느껴지는가 하면, ‘트랜스포머2(2009)’에서 옵티머스 프라임이 기계음을 내며 거대한 IMAX 스크린을 가로지르는 장면에서는 엄청난 경외감마저 느껴지고, ‘헬로 고스트(2010)’에서 주인공이 기억을 되찾는 순간 마치 수많은 기억들이 한 곳으로 몰려드는 것 같은 엄청난 전율이 느껴진다. 영화나 음악에서의 감동은 ‘질적인 움직임’을 의미한다. ‘합창’교향곡에서 내가 인류 전체와 하나 되는 느낌, ‘여름 안에서’는 1994년으로 그때로 날아가는 느낌, ‘트레인스포팅’에서 모든 것을 떨쳐내는 느낌은, 지금의 ‘나’를 벗어나 새로운 ‘나’를 경험하는, 질적인 변이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원형경기장의 볼 때 우리는 단지 규모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안으로 밖으로 시선의 움직임을 경험하고, 그리스 신전이나 르네상스 교회 입면의 아름다움 역시 비례라는 추상적인 체계로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입면 요소들간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의 ‘질적 움직임’은 ‘공간성’의 체험이 아니라 ‘시간성’의 체험이다.
18세기 독일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은 ‘라오콘: 시와 회화의 한계(Laokoon: On the Limits of Painting and Poetry, 1766)’에서 트로이 제사장인 라오콘의 유명한 석상과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d)에 등장하는 트로이 제사장을 비교하며, 석상은 서사시에 나오는 제사장의 고귀함을 담아내지 못하고 단지 육체적 고통만 표현하는데 그쳤다고 하며, 시간 예술로서 시(문학)이 공간 예술로서 회화(조각)보다 상위의 예술이라 주장하였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역시 비슷한 주장을 하였는데, ‘비극의 탄생(The Birth of Tragedy, 1872/1967)’에서 라파엘의 ‘성 세실리아의 환희(The Ecstasy of Saint Cecilia, 1516-1517)’를 예로 들며, 악기를 모두 바닥에 떨어뜨리고 천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성 세실리아의 모습은 음악을 이미지로 표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하며, 궁극의 시간예술은 음악이라고 주장하였다.
감동적인 공간들 역시 시간성이 강한 곳이다. 수천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며 둥그렇게 패인 베로나 원형 경기장의 돌계단에서나, 수백년 수많은 사람들이 잡아 반짝거리는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의 나무 난간에서 느꼈던 감동은 ‘역사적 시간’의 체험이라면, 영주 부석사에 올라 뒤돌아 눈앞에 펼쳐진 봉황산과 소백산맥의 절경과, 담양 소쇄원의 광풍각에 누워 눈을 감고 물 냄새와 대나무 소리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자연의 시간’의 체험이고,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벽면을 빽빽하게 채운 디테일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장인의 손길을 통해 담겨진 ‘인간의 시간’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체험하는 것일까? 해답은 바로 우리 뇌의 ‘거울뉴런(Mirror Neuron)’에 있다. 거울뉴런을 통해 다른 사람의 ‘심리적 움직임(감정)’을 마치 우리 자신의 감정처럼 느끼고, 다른 사람의 ‘육체적 움직임(행동)’을 우리 자신의 행동처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거울뉴런을 통해 ‘세계의 움직임’을 우리 자신의 ‘움직임’처럼 느낄 수 있다. ‘시간’이 감동적인 것은 바로 궁극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나무 난간이 감동적인 것은 그 난간을 잡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을 하나하나 잡을 수 있기 때문이며, 아주 꼼꼼하게 깎은 대리석 장식이 감동적인 것은 그 석물을 만들었던 장인의 정성스런 손길 하나하나를 나의 손길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번화가를 따라 서있는 거대한 유리 건물이나 거창한 형태의 건물보다, 북촌이나 서촌 같이 소소한 사람의 흔적이 쌓인 공간이 더 감동적인 이유는, 그 흔적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감정을 공유하며, 수많은 기억을 같이 만들며, ‘시간의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동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