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 같은 예술가의 삶: 잭슨 폴록의 <넘버 1: 연보랏빛 안개>
폭풍우 같은 예술가의 삶: 잭슨 폴록의 <넘버 1: 연보랏빛 안개>
  • 우정아 교수 / 인문사회학부
  • 승인 2014.03.19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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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2) 미술

유난히 영화로 만들기 좋은 예술가의 삶이 있다. 천재이면서 교황과의 불화로 끝없이 갈등했던 미켈란젤로의 삶이 그렇고, 짧은 시간 동안 불꽃처럼 예술혼을 불사르고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이 그렇다. 평범하게 결혼해서 자식 낳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소박한 생활인이 예술가라면 우리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예술가란 마땅히 일반인과 뒤섞일 수 없는 극단적인 존재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독과 우울을 먹고 사는 예술가의 신화, 그 정점에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이 있다.
그는 살아생전 최고의 성공을 누리면서 명성과 더불어 악명을 드높였다. 일평생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폭력적인 성격이었지만, 평온한 자연을 사랑했다. 인정받기를 갈구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견디지 못하는 은둔형 인간이었다. 수많은 여자들과 놀아나는 데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오직 한 여자, 화가이자 부인이었던 리 크레이스너(Lee Krasner)를 떠나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어린애 같았다. 그런 성격만큼이나 거칠고 파격적인 추상 회화를 통해 20세기 미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지만, 44세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폴록은 만취상태로 운전을 했고 애인과 함께였다. 지난 2000년, 그의 폭풍 같은 일생은 배우 애드 해리스가 주연하고 감독한 영화 [폴록(Pollock)]으로 다시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 중서부 와이오밍 주의 농가에서 태어난 폴록은 가족과 함께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 등지로 옮겨 다녔다. 퇴학을 밥 먹듯 당했지만, 1930년에 뉴욕에 정착한 이후로는 미술 공부에 전념했다. 1938년경부터는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카를 구스타프 융의 이론에 따른 심리 치료를 몇 년 동안 받았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심리상태를 명확한 언어로 구술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의사들은 그가 그린 그림을 읽어나가며 치유를 시도했다. 폴록은 자유롭게 요동치는 형태와 강렬한 색채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들로부터 억눌린 내면을 표출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발견했다.
폴록의 본격적인 실험은 세련된 도시 뉴욕을 떠나 한적한 자연이 있는 롱아일랜드로 이사하면서 시작되었다. 버려진 창고를 스튜디오로 삼았던 그는 전통적인 이젤에서 캔버스를 떼어냈다. 붓과 팔레트를 버려두고, 밑칠을 하지 않은 거대한 캔버스 천을 그대로 바닥에 펼쳐두고 온 몸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렸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린다’는 동사는 ‘무엇을’ 그리는지 그 대상이 있어야 마땅한데, 폴록에게는 ‘무엇’이 아니라 다만 그리는 순간의 행위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감 통에 나무 막대와 페인트 브러시 등을 마구잡이로 담아두고 손에 닿는 대로 집어 들어 물감을 흩뿌리고 던지고 끼얹었다. 폴록에게는 꾸밈없이 펼쳐진 캔버스가 마치 미국의 대지와도 같았다. 그 위를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온 몸으로 물감을 흩뿌리는 폴록의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작업의 순간에 대해 폴록은 “글자 그대로 그림 속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림과 더 가까이, 그 일부가 된 것을 느낄 수 있다”라고 표현했다. 그에게 완성된 회화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구속도 받지 않고 그림 속에서 자기 자신과 그림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그 순간의 행위가 그에겐 의미 있는 예술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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