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구계에도 ‘성실한 실패’가 격려받을 수 있을까
국내 연구계에도 ‘성실한 실패’가 격려받을 수 있을까
  • 이재윤 기자
  • 승인 2014.03.0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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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 성실실패 인정 연구제도

유럽 최대의 기업가정신 커뮤니티인 AaltoES는 2010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세계 실패의 날(day for failure)’ 행사를 개최했다. 현재 10월 13일로 제정되어 전 세계로 확산된 이 행사에서는 매년 벤처 기업가들이 자신의 도전을 통해 얻은 자산인 실패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 배워나가고 있다. 2012년 우리나라에서도 이 행사가 열린 바 있다.
이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격언은 단순히 끈기와 노력을 환기하는 메시지를 넘어, ‘실패학’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이를 통해 성공으로의 길을 성찰하는 글로벌트렌드가 되었다. 이공계 연구 또한 가설 설정과 검증을 통해 선택이 가능한 길을 줄여가는 과정이라 본다면 실패를 통하여서도 배울 점이 많다. 그런데도 실패를 여전히 정형화되고 규격화되어 있는 제도나 규정으로 판정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인식과 문화가 아직도 선진국을 따라가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포항공대신문은 국내 이공계 성실실패 연구제도의 현주소에 대해 알아보았다.  <편집자 주>


성실실패 인정 연구제도란.
현대 선진국들은 국가 발전 과정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직접 체험하였기 때문에 정부가 최적의 연구 여건과 환경을 위해 투자하며 성과 창출을 기다릴 줄 안다. 이러한 성과창출은 매우 도전적 연구에서부터 출발하며 리스크가 커 목표 달성여부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연구의 중간 및 최종에 대해 성급히 성패 판정을 내리기보다는 기획과 진도관리에 집중하여 성공적인 결과가 창출을 지원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선진국들은 창출된 성과의 파급효과가 국가안전, 국민의 행복, 신산업 창출로 나타난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SCI 논문 수, Impact Factor와 같은 양적 기준보다는 질적 성과와 성과창출을 위한 연구수행의 적절성 여부가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이러한 선진국 문화와는 달리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연구는 선진 기술을 배우고 이를 양적 측면에서 향상시키는 수준으로, 상대적으로 과제에 성공하기는 쉬우나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성과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성공하면 갚아야 하는 대출 형식 재원의 비중이 높고 최종결과를 위한 사업투자 형식이 일반적이었다. 최근 기초과학과 융합기술을 위한 도전적 연구의 중요성이 중시되는 가운데 성실실패 연구제도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성실실패란 연구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으나 그 과정을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의미로, 이 연구자가 향후 국가연구개발사업 참여 제한 등 벌칙조항에 저촉되지 않도록 구제하는 사회적 장치를 성실실패 연구제도라 한다. 이를 통해 연구자에게는 연구에 재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며 정부 또한 이러한 내용을 정리하여 다른 연구개발사업의 기획과 지원, 평가에 활용할 수 있다.

국내 법제화 시도의 발자취는.
2000년까지 산업기술개발사업에 참여한 연구책임자는 개발목표 달성에 실패하면 노력 여하에 상관없이 기술개발지원 자금을 환수당하거나, ‘불성실 연구원’으로 분류돼 다른 기술개발 사업에의 참여가 제한돼왔다. 이에 2001년 산업자원부는 ‘산업기술개발사업운영요령’ 개정을 통해 산업기술평가원 산하 기술개발 사업별 평가위원회를 구성, 정부 산업기술개발사업에 참여하는 기관별 연구책임자의 과제수행 정도를 측정해 성실성과 노력이 인정되면 개발에 실패했더라도 책임을 면해 주기로 했다. 또 연구책임자의 행정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개발사업비 정산절차를 간소화하고 기술개발사업의 성과로 벌어들이는 기술료 징수율을 삭감하며 남는 돈은 기술기획 사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2001년 12월에는 이 안을 재개정하여, 산업기술개발사업 지원과제를 선정할 때 다단계 평가를 실시, 핵심기술개발에 정책자금을 집중 투입키로 했다. 또 우수 기술개발자에 대한 성과급을 현행 30% 수준에서 50% 이상으로 대폭 늘리기로 했다. 아울러 기술개발이 진행중인 계속사업에 대해 다단계 중간평가를 실시, 개발이익이 큰 과제만 지속적으로 지원하되 성실하게 수행된 실패과제에 대해선 책임을 면제, 연구개발을 활성화할 방침을 마련했다.
이듬해 7월부터는 이를 국공립 대학으로 확대하여 기술이전전담조직 설치를 유도해 기술 사업화를 촉진하는 한편 기술개발 평가방법을 기존의 `성공-실패’에서 `성실-불성실수행’으로 바꾸는 방안도 추진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R&D 실패에 대한 면죄부 논란 등을 겪으며 뚜렷한 실적을 내지 못한 채 주저앉았다.
이 제도가 다시 공론화된 것은 2010년이다. 정부가 과학기술계 연구자의 도전성과 모험성 등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 2010년 새로 도입해 운용해온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성실실패가 인정된 실적이 매우 저조하다. 2012년 10월 23일 전자신문이 새누리당 민병주 의원, 전자신문과 한국연구재단 및 25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성실실패 인정제도 시행여부 및 판정결과를 분석한 결과 제도 시행 3년간 성실실패 인정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더불어 미래창조과학부 자료 분석결과 전체 국가출연연 25곳 가운데 76%인 19개 기관은 제도자체를 시행하지 않고 있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등이 평가기관이 이 제도를 적용한 실적도 전무했다. 또 성실실패 인정제를 도입한 원자력연구원과 생명공학연구원, 천문연구원, 전기연구원, 식품연구원, 김치연구원 등 6개 기관에서도 실패과제를 대상으로 성실실패 인정 여부를 판정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다만, 지난 2010년 한국연구재단이 `모험연구사업`에 이 제도를 시범 적용해 성실실패를 판정한 사례가 4건 있었다. 한국연구재단이 지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 시행한 모험연구사업 과제 수는 총 191건에 예산은 213억원이 지원됐다. 이 가운데 실패평가가 전체의 2%를 갓 넘긴 4건이 나왔다. 재단은 곧바로 성실실패판정위원회를 열어 4건 모두를 성실실패로 인정해 구제했으나 여전히 미흡한 현황이다.

2010년 이후,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계는 국가연구개발사업 연구과제 평가에서 열심히 일하고도 ‘실패’ 판정을 받으면 과제참여 제한과 연구비 환수조치 등 제재를 받기 때문에 각 평가에서는 웬만하면 미흡 판정을 주지 않는다. 이 때문에 과학기술계에서는 ‘과제 90% 이상 성공’이라는 황당한 신화가 이어져왔다. 실제 미래부와 KISTEP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R&D 성공률은 2011년까지만 해도 97%를 넘었다. 지난해에는 88%였다.
이로 인해 과학기술계는 과학기술 연구자들이 평가받는데 유리한 방식의 연구만을 진행하는 등 도전적인 연구시도가 거의 없는데다, 과제 성공률이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평균 90%를 넘는 등 현실과 동떨어진 연구결과가 많아 성실실패 용인 시스템을 지속 요구해 왔다.
박근헤 정부가 창조경제 실현계획을 마련하면서 내건 슬로건 성실실패 제도는 2013년 다시 공론화되며 보다 확고한 법제화를 꾀하고 있다. 민병주 의원은 “지난 8월 과학기술분야 연구자의 `성실실패`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과학기술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해 놨다”며 “법으로 이 제도가 안정화되면 상당부분 인식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이번 개정안은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과제목표 달성에 실패했더라도 연구수행의 성실성이 인정되는 경우 제재를 감경받을 수 있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현행 국가연구개발사업 연구과제 평가에서는 목표 달성 실패로 결정되는 경우 연구자들의 과제참여 제한, 연구비 환수 조치 등 제재가 따라 도전적인 연구 시도를 꺼리게 되는 등 부가가치 창출 및 질적 성과 담보에 한계로 지적돼 왔다.
미래부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해 관련 정책 반영을 추진하고 있고 정홍원 국무총리도 제2회 국가과학기술심의회에서 연구개발 재도전 기회 제공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심의. 확정한 바 있어 향후 제도의 성공적인 도입 여부가 주목받고 있다.

우리대학은 어떨까
우리대학은 high risk, high return를 새로운 연구 풍토로 도입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각 학과별로 새로운 연구 마스터플랜을 수립해 국제적 기초역량 확보를 목표로 하는 한편, 21세기 변화 방향에 부합하는 교육과정 및 교육 강화 방안, 융합교육, 연구를 위한 지원금(seed money) 지원 등의 프로그램이 이루어지고 있다.
더불어 지난 2012년 의료기기 분야 학생연구자를 대상으로 제정된 ‘총장 장학금’과 SK-하이닉스 장학금 등을 제정해 대학원생 뿐 아니라 학부생에게도 실패 가능성이 높은 연구에 도전적으로 임할 것을 장려하고 있다.
지난해 기획예산팀에서 발표한 우리대학의 중장기 발전계획 중 연구 부문의 ‘High impact 연구역량 지원 강화’ 사업에서도 고위험군 연구자에 대한 교직원 재임용 및 정년보장 심사 등에서 성실실패 인정 도입이 검토 중이라는 점이 언급된 바 있다. 이에 대학원생들은 연구 실패 시 재심사 기간 3년 연장 등 구체적인 안이 제시되어야만 고위험 연구에 대한 도전을 독려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도전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사회적, 제반적 환경을 강화하기 위해 의견을 모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