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
새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
  • 민병원 /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승인 2014.01.01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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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1989년 12월 마지막 날 지중해상에 정박한 소련의 유람선 막심 고리키에서 당시 미국과 소련의 두 정상,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공산당서기장이 만났다. 그들은 “냉전은 끝났다”라고 선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를 이어온 초강대국 중심의 양극화 질서가 종식된 것이다. 세계는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동서진영 간의 대립에서 벗어나 평화와 협력의 분위기로 탈바꿈하는 듯했다. 그러나 세계는 이전 수백 년에 걸쳐 겪어온 것만큼이나 험난하고 굴곡진 역사를 만들어왔다. 냉전 종식 선언에 담겨 있던 희망의 메시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하나의 세계? 환상과 착각을 넘어
1990년대는 ‘세계화’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과거에 ‘국제’라는 말이 표준어로 자리 잡았지만, ‘세계화’ 또는 ‘지구화’라는 표현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모든 국가의 장벽을 뛰어넘는 ‘하나의 세계’가 등장했다는 말이다. 세계화의 구호와 담론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었고, 그에 담긴 경쟁과 효율성의 논리는 자연스럽게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다. 세계화의 구호는 UN이나 세계무역기구 등 여러 국제기구, 모든 나라의 정부, 기업, 사회활동의 전면에 등장했다. 하지만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의 미명하에 무한경쟁과 갈등의 반복을 초래했고, 그로부터 수많은 약자들과 패자들을 양산해냈다.
2001년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9.11 테러는 지구공동체에 또 다른 고난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세계 유일의 최강대국으로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일방주의적, 강압적 외교와 전쟁을 불사했고, 이는 전 지구적 차원의 정치관계를 더욱 경직되게끔 만들었다. 국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이제 21세기의 전투적 상황 속에서 ‘생존’의 문제는 더욱 처절하게 불거졌다. 냉전기 상황이 초강대국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기반으로 한 ‘차가운 평화’를 유지해왔다면, 21세기의 지구는 더욱 불안한 경쟁과 분쟁의 소용돌이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것일까?

머나먼 이웃: 동아시아의 미완성
근대 프로젝트
잠깐 지구 반대편의 유럽을 보자. 오랜 노력을 거쳐 유럽연합이라는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앞선 정치단위체로서, 평화와 협력을 위한 그들의 정치실험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직 해결해야 할 난제가 많이 남아있지만, 이제 유럽에서 더 이상의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서 있는 동아시아도 눈길을 돌려보자. 역사문제와 외교적 갈등, 영토문제에 더하여 핵무기 개발 등 군사적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고 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긴장이 고조된 지역 중의 하나가 바로 동아시아인 것이다.
유럽의 상황에 비해볼 때 동아시아의 분쟁과 갈등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여전히 국가 건설과 경제발전이라는 근대화 프로젝트에 매몰되어 대외적으로 배타적인 감정들이 고조되어 있다. 말하자면 가까운 이웃과 더 사이가 나쁜 것이다. 서양의 침탈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궤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글로벌 차원의 긴장과 갈등에 더하여 동아시아의 지금 상황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G2의 한 축으로서 중국이 짧은 기간 안에 거대한 지역 헤게모니 국가로 성장하고 있는 것도 주변국을 불안케 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북한의 핵 개발과 호전성, 일본의 몽니와 재무장 움직임, 역외국가로서 미국의 전략적 개입 등이 맞물리면서 동아시아의 정치적 불안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지고 있다.

남북한: 형제인가, 적인가?
한반도의 상황은 더 오리무중이다. 북한이라는 추가적인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3대 세습이라는 기막힌 정치 현실도 문제지만, 분단 이후 70년이 다 되어가도록 평화와 협력의 분위기가 아직도 요원하다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남북한은 서로가 하나의 민족, 형제의 나라로서 인식하기보다 생존을 위협하는 적대적 상대로 간주해왔다. 간헐적으로 추진되어오던 인적 교류, 경제협력, 정치회담, 긴장완화 등의 노력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두 나라의 무력수준은 상상을 초월하며, 잠시 한눈을 팔았다가는 ‘제2의 한국전쟁’이 벌어지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어수선한 세계정치의 기후 속에서, 긴장이 고조된 동아시아 지형 위에서, 한반도의 오늘 날씨는 여전히 ‘흐림’이다.
오늘의 북한은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실패국가’ 사례로 남아 있다. 한물 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간판 뒤에서 벌어지는 폐쇄사회의 처절한 비극은 ‘인간을 위한 그 어떤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한다. 비단 남북 관계뿐만 아니라 주변국가, 나아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북한의 정치행태는 합리적이고 합당한 수준의 상호작용에 대한 기대를 냉큼 저버리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더하여 고통받는 동족의 신음소리는 외면할 수 없는 도덕적 의무와 풀리지 않는 난제의 무게감을 더해주고 있다.

궁극적인 해답: ‘우리’로 눈을 돌리자
1997년 말 외환위기, 성장과 민주화의 대로를 질주하던 근대 한국사회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달픈 이야기들이야 많겠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는 생겼다. 뒤처진 사람들을 더 챙기고, 미래 세대를 위한 건설적인 생각도 다듬게 되었다. 양적인 경제발전과 겉치레 민주주의가 아니라 모든 부작용과 반대의 목소리를 고려한 국가전략에 대한 관심들이 커졌다. 안타깝게도 이런 시대적 소명에도 불구하고 국내사회와 정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 불어오는 신자유주의의 ‘외풍’이 너무 거센 탓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성공을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고, ‘우리’보다는 ‘나’의 승리가 더 급했다. 지금 이 순간, 전국을 휩쓸고 있는 “안녕들 하십니까”의 열풍이 새삼스레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냉전 이후, 복잡한 우리의 과제는 국내사회에서부터 역순으로 풀어가야 한다. 수십 년을 매달려도 잘 풀리지 않는 방정식이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에, 이 땅 위에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이유이다. 이제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떠밀려 다니던 ‘개인으로서의 나’ 대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나’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볼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보이고 이해된다. 사회 속의 ‘다른 나’를 인식하면서 북쪽의 동족을 이해하게 되고 이웃나라와 공존하는 길을 찾아 갈 수 있다. 그래야만 진정한 글로벌 공동체가 가능하리라.
경쟁과 합리성의 덫을 넘어 포용과 상생의 해법을 추구하라. 아주 모호한 문제지만, 해답은 구체적이고 작은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바로 ‘나’를 둘러싼 장벽을 뛰어넘어 ‘우리’를 찾아가는 마음가짐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