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생물학의 사례로부터 바라본 융합과 한국사회
분자생물학의 사례로부터 바라본 융합과 한국사회
  • 김우재 / 분자생명과학부 박사08
  • 승인 2013.11.2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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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 이공계 학제 간 융합

불과 10여 년 전부터 국내의 유수한 대학들이 학제 간 ‘교류’를 위한 조직을 급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학부제가 시행되었으며 정체모를 협동과정들이 대학원에 들어섰다. 학제 간 교류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평가하기 이를지 모르겠지만 대학 내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똑같은 일이 ‘융합’ 혹은 ‘통섭’이라는 단어로 재현되고 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집단은 반드시 그 역사를 되풀이한다. 학제 간 교류의 유행이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면, 단어만 바꾼 채 재등장한 융합이라는 구호는 불필요했을 것이다. 한국 연구자 집단이 학제 간 교류 혹은 융합에 이르지 못하는 근본적 이유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따라서 그 대안도 융합과 통섭을 가로막는 한국 연구자 집단과 대학/대학원의 구조적인 문제를 근원부터 뜯어 고치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분자생물학은 20세기 중반 등장한 새로운 학문의 패러다임으로, 흔히 유전학과 생화학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분자생물학을 성공적인 학제 간 교류 혹은 융합과학으로 정착시킬 수 있었던 구조적 요인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분자생물학이 오래된 생물학을 대체하는 패러다임이 될 수 있었던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개방성: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많은 물리학자들이 생물학으로 눈길을 돌렸다. 막스 델브뤽을 위시한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생물학에 심기 시작했으며, 분자생물학의 중흥에는 델브뤽이 젊은 과학자들을 모아 조직한 ‘파지그룹’이 있었다. 전통적인 생물학자들과 신흥 물리학 배경의 과학자들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당시 생물학자들은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단순한 문화적 차이 때문은 아니었다. 대학과 연구소를 비롯한 제도적 지원이 생물학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흡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새로운 분야로 뛰어드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중심성: 분자생물학은 물리학과 생물학의 중간 지대에서 생겨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생물을 연구하던 생물학의 조직 위에 물리학자들이 대거 투입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결과 분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 분자생물학이 전통적인 생물학을 ‘대체’하게 되었다.
△자율성: 연구의 인프라를 지원하는 조직이 오래된 학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신생학문에 지원할 때,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융합은 일어날 수 없다. 당시 락펠러 재단을 비롯한 연구재단들이 바로 이 일을 했다. 연구비를 지원하고 연구를 후원하되, 지나친 간섭을 피하고,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 평가했다. 즉, 연구재단이 구체적이고 세세한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큰 목표에 부합하는 연구에 긴 안목으로 투자한 것이다. 적어도 20년의 이러한 지원이 없었다면, 분자생물학의 중흥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분자생물학으로부터의 교훈을 한국사회의 융합이라는 허세에 적용할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첫째, 개방성의 측면. 개방성의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학문 간 장벽은 상당히 높다. 개방성의 문턱을 낮춰야 하는 지점은 학부가 아니라 대학원이다. 필수과목과 같은 형식적 장벽으로 재능과 열정이 있는 연구자들을 입구부터 막을 것이 아니라, 대학원 인턴과 같은 형식을 도입해 전혀 새로운 분야에서 연구할 기회를 주고 이들을 새로운 분야로 유입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둘째, 중심성의 측면. 융합과학기술대학원과 같은 쓸모없는 허수아비 학과를 창설할 것이 아니라, 중심이 되는 학문 분과가 개방성의 원리를 도입해서 다양한 배경을 지닌 연구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융합에 더욱 가까워지는 지름길이다. 서로 상이한 연구방법론과 철학을 지닌 두 분과를 하나로 묶는 것이 융합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인지과학과 예술을 융합하고 싶다면, 미대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한 연구자 중 예술의 융합에 관심 있는 이를 더 많이 채용하는 것이 새로운 학과를 만드는 것보다 효과적이다.
셋째, 자율성의 측면. 융합학문을 해야 한다는 국가적 명령이야말로 융합을 저해하는 요소다. 무엇이 되었건, 융합을 원하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연구의 자율성의 폭이 넓어지면 융합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실상 국가주도의 시스템은 융합학문 창조에 부적절하다. 모든 혁신은 민간에서 일어난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자율성의 철학과 긴 안목으로 제대로 된 연구자들을 선정해 지원하는 것뿐이다. 5년이라는 대통령 임기 내에 뭔가를 이루어보겠다는 시도 자체가 융합의 독이 될 것이다.
융합의 정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학문의 역사는 그 자체로 융합의 역사이기도 하다. 내용 없는 허무한 구호들을 줄이고, 융합을 말로만 외치는 이들보다 현장에서 실제로 조용히 융합연구를 수행중인 이들에게 눈을 돌린다면, 현재의 허울뿐인 한국사회의 융합과 통섭도 10년 후 쯤엔 성과를 낼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