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텍에 대한 설레는 기대
포스텍에 대한 설레는 기대
  • 이권효 동아일보 대구경북취재본부장
  • 승인 2013.11.2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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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포스테키안과 철학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긴 여운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처럼 가을빛 짙은 계절이면 더욱 또렷하게 떠오르곤 한다. 노벨물리학상(1998)을 받은 로버트 러플린 교수(64·스탠포드대)도 그런 사람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때는 2004년 포스텍 캠퍼스였다. 당시 그는 포스텍에 있는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 소장으로 부임했다. 그 소식을 듣도 나는 호기심이 들었다.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 내용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고 싶었다. 
내가 인터뷰를 통해 탐구해보고 싶었던 것은 러플린 교수의 아우라(aura), 즉 쉽게 흉내내기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다. 노벨과학상은 세계 최고 수준의 탁월한 연구의 상징이지만 그런 결과보다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나 정서, 태도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포스텍의 도움으로 이뤄진 인터뷰 내용은 2004년 4월 27자 신문에 자세히 실렸다. 인터뷰 통역을 해준 분이 최근 APCTP 소장에 취임한 포스텍 물리학과 김승환 교수(54)이다.
러플린은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찬 자연’을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다고 했다. 제목을 보면 그 글은 논문이 아니라 에세이로 짐작된다. “신비롭고 놀라운 것들로 가득한 자연에서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기 위한 끈기 있는 노력은 과학기술과는 아주 다른 차원”이라고 했다. 또 “내가 인내심을 갖고 자연을 탐구하는 원동력은 예술적 감성이다. 내가 세상에 새로운 발견을 내놓았다면 바로 이런 태도 덕분”이라고 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진정한 실력자들에게  보이는 공통점인 ‘소박한 태도’를 잘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좁은 경험에 비춰봐도 탁월한 실력자는 자신을 은근히 뽐내거나 자기 생각 또는  가치관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다시피 하는 태도가 거의 없다. 대신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분위기가 있다. 러플린도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자연의 미묘한 움직임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느냐가 과학 탐구에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가 매우 넓고 깊은 세계를 추구하고 있음을 느꼈다. 어떤 생각에 갇혀 단정하는 말투가 아니라 여러 측면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앎을 추구하는 개방적 태도가 와 닿았다. “의존하지 않는 독립심으로 개방적이고 자유스럽게 꾸준히 새로움을 추구하는 용기가 결국 뛰어난 과학적 성과로 연결되는 것 같다”는 그의 말과 일치하는 태도다.
나는 그의 이런 자세에서 동양사상에서 매우 중시하는 신독(愼獨,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단련함), 또 공자가 『논어』에서 말하는 ‘군자불기’(君子不器, 넓고 깊은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칸막이에 갇히지 않음)라는 말을 떠올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포스텍 학생이나 교직원은 대부분 알 것으로 짐작되지만 과학철학 분야의 기념비적 연구서인 토마스 쿤(1922~1996)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도 그런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 과학뿐 아니라 인문사회 분야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패러다임’(으뜸이 되는 표준적인 인식 틀)이라는 말이 이 책에서 처음 사용됐다.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활용해 과학 발전의 역사는 패러다임의 전개 역사라는 점을 강조했다. 과학의 혁명적 발전에는 단계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었다고 증명한다. 한 가지 패러다임은 영원한 게 아니라 과학 발전과 함께 떠오르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할 수 있겠다. 태어나 일정 기간 객관적인 인식 ‘틀’로 작용하다 늙고 병들어 결국 사라지고 그 자리는 또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기는 과정과 비슷하다.
러플린이 자연탐구를 개방적 자세로 추구하는 모습도 ‘바뀔 수 있는’ 기존의 패러다임에 안주하고 매몰되면 진전할 수 없다는 강한 신념에서 가능했다고 짐작된다. 그렇지 않다면 새로움의 추구, 독립적이고 끈기 있는 탐구, 자연의 미묘한 모습에 귀 기울이는 태도가 오랫동안 자신을 한결같이 지탱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언어학에서 빌려왔다. 하버드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뒤 스탠포드와 MIT 등 여러 대학에서 과학과 언어학, 철학을 배우는 등 통섭적 환경에 있었기에 패러다임은 탄생할 수 있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이때 철학은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학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물리학 생물학 문학 정치학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를 이뤘다. 우리에게 익숙한 ‘형이상학’(形而上學, 동양 고전 『주역(周易)』에서 나온 말)은 ‘메타피직’을 번역한 말이다. ‘피직스’는 물리학인데 ‘메타’는 ‘뒤에’라는 뜻이다. 메타(meta)는 후에 ‘뛰어넘는’ ‘초월하는’ 뜻으로 확장됐다.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그의 저작을 분류 정리하던 중 자연학(물리학)과는 성격이 아주 다른 내용의 글을 보고 이를 자연학 문헌 뒤쪽에 정리하면서 ‘메타피직’이 생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물리적 현상 뒤에는 그 현상을 그렇게 드러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원인이나 실체(實體)가 있다고 보고 이를 탐구했다. 이런 형이상학을 ‘과학’과는 거리가 먼 엉뚱한 이야기 정도로 인식한다면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앎의 세계를 너무 좁게 바라보는 편견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우주, 삶, 자연)을 이루는 이치는 물리나 생리(生理)뿐 아니라 도리(道理) 윤리(倫理) 순리(順理) 정리(情理) 심리(心理) 법리(法理) 진리(眞理) 등 여러 가지이다. 이러한 이치와 가치가 촘촘한 그물처럼 짜여 있다.
통섭 융합 소통 호기심 열정 경이로움 도전 변화 창조 새로움…. 이 같은 말의 씨앗이 내 몸에서 싹을 틔우는 힘이 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우리를 둘러싼 크고 작은 ‘생각의 칸막이’를 넘어서면서(메타) 유연하게 만드는 태도가 매우 중요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메타피직, 즉 물리학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마인드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포스텍 학생들의 가슴과 연구실험실, 캠퍼스 곳곳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꿈꾸는 아우라가 뿌리내릴 때 포스텍은 과학과 철학을 융합하는 지구촌의 진정한 실력자가 되지 않을까. 노벨상도 메타피직(형이상학)의 나무에 열리는 열매의 ‘하나’일 뿐이라는 넓고 깊은 태도가 포스텍의 오늘과 내일을 이끄는 힘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