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단위에 따라 재편되는 스크린, 우리의 선택은
자본 단위에 따라 재편되는 스크린, 우리의 선택은
  • 이승훈 객원기자
  • 승인 2013.09.2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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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거대자본이 지배하는 문화

아마 당신은 2000년 이후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 멀티플렉스가 당신의 문화적 경험을 넓혀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멀티플렉스가 보유한 많은 스크린이 소비의 측면에서는 영화 선택의 폭을 확장하고, 생산의 측면에서는 대중 상업영화부터 독립 예술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콘텐츠의 생산을 확대해줄 것으로. 허나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더 좁아진 문화적 경험, 좁아진 영화 선택의 폭이다. 여덟 개의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것은 여덟 개의 다른 영화가 아니라 복제 상영되는 하나의 영화일 뿐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8지선다가 아닌 1지선다, 단일문항뿐이다. 우리는 선택하고 있지 않다. 단지 자본에 의해 선택되고 있을 뿐이다.
문화는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주요한 행동양식, 상징체계를 말한다. 그리고 문화산업은 좁게는 오락의 요소가 상품의 부가가치 형성에 큰 역할을 하는 산업을 의미하며, 넓게는 문화와 예술분야에서 콘텐츠를 창작ㆍ상품화ㆍ유통하는 모든 단계의 산업을 의미한다. 또한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문화와 예술 상품을 생산하고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을 문화산업의 주요 활동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이윤창출이 가능한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정신적 가치, 감성을 바탕에 두고 있는 문화산업마저 여타의 산업들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화폐 단위에 따라 재편하였다. 대중의 삶의 질이 향상됨에 따라, 엄밀하게는 산업혁명기 이후 급속도로 진행된 ‘여가의 상품화’에 따라 문화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성장한 문화산업이 자본주의의 논리에 편입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물론 자본의 유입이 문화산업에 불이익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영화 입장권 통합전산망 구축’으로 인한 체계적인 수익 관리, 한류열풍을 불러온 전략적 수출입 등은 대기업의 거대자본으로 인한 산업 내의 긍정적 효과이나, 현재는 그 자본이 오히려 독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자본의 논리 아래에서 문화계는 한낱 콘텐츠 하청공장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특히 영화계에서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국 영화산업의 자본형태는 1980년대까지의 지방흥행사 자본의 시대와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대기업 자본 유입의 시대, 그리고 1990년대 말부터 시작한 금융 자본과 창업투자 자본의 시대로 나뉜다. 그리고 대형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시장 경제의 논리는 영화산업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거대 자본이 유치됨에 따라서 작품의 규모는 대형화되었고, ‘쉬리’와 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영화가 출현했다. 마찬가지로 거대 자본의 수익을 위한 유통구조인 멀티플렉스가 생겨났으며, 2000년대 이후 CJ엔터테인먼트, 롯데시네마 등의 기업형 영화제작배급사들이 등장했다.
기존의 배급시장에서 독립적인 대기업 계열사가 등장하며 영화산업 내적 자본의 규모는 커졌고 이러한 자본의 확대는 결국 영화 기획-제작-배급-상영이 하나의 자본 혹은 대기업에 의해 총괄되는 ‘수직계열화’ 체제를 불러왔다. 그리고 영화산업 전체가 소수의 자본에 의해 관리되기 시작한 이때부터 영화산업 내에서는 자사 배급 영화를 밀어주기 위한 스크린 독과점 등의 병폐현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단지 영화계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이미 대부분의 문화산업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무한복제가 가능해진 디지털 환경, 무한생산과 무한소비를 지원하는 환경 속에서 음악 산업은 음원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며 자본이 유입되었고 현재는 이동통신사 위주의 시장으로 변모했으며, 대형포탈 중심의 만화(정확히는 웹툰)시장, 소수의 대형체인에 의해 운영되는 대형출판업도 마찬가지로 소수 거대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으나, 유독 한국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국 문화환경에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중 문화소비의 취향이 획일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멀티플렉스가 장악하고 있고, 대중음악은 지상파 방송사가 장악하며, 뉴스와 웹툰은 메이저 포탈이, 그리고 디지털 음원은 거대 이동통신사가 장악하고 있다. 거대자본은 수직 계열화되는 것뿐만 아니라, 수평적으로도 확장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콘텐츠는 지상파 방송은 물론 포탈, 모바일로도 급속하게 확산되어 하나의 소비 취향, 트렌드를 구축한다. 일반 대중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거대자본하에서 콘텐츠에 독점적으로 노출된다. 결국 이처럼 문화자본의 형성과 축적, 문화콘텐츠가 유통되는 미디어가 독점화, 수직계열화, 수평적 확대에 이르면서 대중이 문화콘텐츠를 소비하는 형태 또한 모두 획일화된다. 그리고 여기서, 획일화된 대중의 소비형태, 대중문화는 대중이 선택하거나 자발적으로 형성된 문화가 아닌 위로부터 강요되는 문화이며 이는 다시 자본주의를 정당화시키고 계급구조를 확산시킨다.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가 끊임없이 순환되어야만 살아남는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생산 못지않게 소비와 유통에 대해서도 강조했으나, 실제로 소비 측면이 사회적으로 부각된 것은 20세기 중후반 이후이다. ‘광고’와 같은 유혹의 기술과 소비자 심리학의 대두는 이런 맥락에 근거해 있으며, 이는 다시 개개인의 선택을 소거하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획일화된 문화 산업 플랫폼과 개개인에게 수동적인 태도만을 강요하는 대중문화는 착취적인 계급사회라는 자본주의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소비’를 중심으로 하는 현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개개인의 문화적 취향은 다시 계급 사이의 구별짓기로 현실화된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일종의 행동양식 혹은 취향을 의미하는 ‘아비투스’를 통해 어떻게 문화가 계급과 지위의 차이들을 유지하고 재생산해내는지를 증명하려 했으며,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에서는 자본주의적 아비투스의 요소로 문화적, 미적 취향을 제시하였다. 대중의 문화적 취향을 획일화시키는 방식을 통해 자본은 계급을 공고히 하며 다시 자본은 문화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다.
인터넷과 같은 디지털 매체가 도래하며 대중문화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기반으로 하는 획일성에서 탈피하고 대중은 문화적 선택의 자유를 획득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관계없이 매체는 다시 자본과 결탁하여 권력구조에 종속됨으로써 더욱 강하게 대중의 문화적 욕구에 반하여 상업문화와 소비문화 속에 대중을 고립시키고 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에 의해 주어진 상품을 선택하는 것은 절대로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선택지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인 이성규씨는 페이스북에서 “대형마트에 라면이 달랑 두 회사 것밖에 없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언론도 보도하고 소비자 관련 단체도 성명서를 쏟아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영화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없다. 지금 한국의 관객은 영화 자본이 지정해 주는 영화만 볼 수 있는 구조인데, 왜 이런 것에 저항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우리는 진정한 선택을 하고 있지 않다. 대중매체와 대중문화의 소비 주체로서 진정한 문화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 스스로 되찾아야만 한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지금 나의 문화적 취향은 자본이 욕망하는 것인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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