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한 희망
담대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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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9.2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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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인생에서 이루는 성취는 제 각각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꿈의 크기와 지향의 차이가 만드는 성취를 자주 목격하곤 한다. 아버지가 아프리카 캐냐인이고 지금도 그의 친할머니가 캐냐에 생존해 있는 사람이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중임 대통령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기적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의 주인공 버락 오바마는 그의 첫 번째 대통령 선거 직전에  책을 한권 냈다. “희망의 담대함”이라는 범상치 않은 제목의 이 책은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현실정치에 무관심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그의 열광적 지지자로 만드는 데 한몫했다. 개개인의 의사가 현실정치에 반영되지 않는데서 오는 무력감과 냉소적인 태도가 오늘날의 정치시스템이 당면한 큰 문제라면, 이러한 냉소주의 극복의 가능성을 보여준 오바마는 이미 그의 담대한 꿈의 일부를 이룬 게 아닐까?
과학사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거대한 꿈을 가졌던 사람들을 도처에서 발견하게 된다. 알란 튜링이라는 영국 사람의 예를 보자. 20세기 초반을 살다간 불세출의 천재 수학자이고 이론전산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유년기부터 생명현상이나 뇌의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인간의 사고 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대담한 꿈을 가졌던 이다. 1999년에 타임 매거진이 20세기에 가장 주요한 영향을 끼친 100명의 인물을 선정해 발표했을 때 그 중 한명이었다.
튜링은 어린 시절부터 수학적 엄밀함에 정통했던 천재였다고 한다. 16세에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읽고 즉시 이해했으며, 그 논문의 결과로 뉴턴 역학이 수정되어야 할 부분을 스스로 추론해 냈다. 기계가 인간의 사고 과정을 모방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했던 그는 불과 20대의 청년이던 1930년대에 이론적으로 컴퓨터의 개념을 만들어냈는데, 물리학자들이 진공관과 트랜지스터 연구에 성과를 내서 실제로 의미 있는 컴퓨터가 만들어지기 전의 일이다.
튜링은 체스를 두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했다. 프로그램을 돌릴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니, 사람이 한 수를 두면 알고리즘에 따라 튜링이 다음 수를 두는 가상 프로그램 방식으로 대국을 했다. 알고리즘의 개념과 계산가능의 개념을 분명히 했고, 임의의 알고리즘이 유한 시간에 종료되는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계산 불가능한 예임도 증명했는데 이는 “튜링의 홀팅 문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제는 대학교에서 전산학을 배우는 학생은 모두 튜링머신이라는 개념을 배워야 하고, 현대 문명에 끼친 영향만으로 하면 튜링은 지성사에 길이 남을 사람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은 암호 해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비밀 연구소를 운영했는데, 튜링은 이곳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했었다. 독일군의 유보트 관련 암호통신 내용을 수학적으로 해독하여, 대서양 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견인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튜링은 청년기에는 이론 컴퓨터의 개념을 만들어 내는 데 몰두했지만, 말년에는 생명 현상의 수학적 설명에 천착했다. 특히 피보나치 수열 같이 생명현상에서 나타나는 수학적 질서의 예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전환의 동기가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사고의 과정에 대한 관심과 생명 현상에 대한 궁금증을 동일한 범주로 본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그는 동물의 표피에 있는 무늬의 다양성에도 관심을 가져서, 이를 수학적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점무늬를 가진 치타나 띠무늬를 가진 얼룩말 같이, 얼핏 혼란스러워 보이는 다양성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튜링은 털 색깔을 결정하는 화학물질과 억제하는 물질이 있을 거라는 가정 하에서, 이 두 물질의 반응-확산 방정식을 만들어 다양한 무늬를 설명하려 했다. 다윈의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이 거대원칙의 역할을 할 순 있겠지만, 진화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튜링의 이러한 발상은 사후에 구체화되어, 2006년에는 독일 막스플랑크의 생물학자들과 수학자들의 공동연구에서 쥐의 털 색깔을 결정하는 화학물질이 발견되었고, 이 화학물질에 튜링의 반응-확산 방정식을 적용하여 관찰된 털 색깔을 설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생명현상에 대한 수학적인 통찰과 접근이 확대된 오늘날, 수리생물학은 이제 현대수학의 한 분야로 여겨지게 되었다. 대수기하학이 계통발생학의 문제에 사용되기도 하고, 통계학은 보편적 연구 도구로 간주된다. 인간의 사고 영역으로 간주되던 수학적 정리의 증명도 기계가 할 수 있도록 하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자동정리증명(automatic theorem proving)이라고 불리는 이 문제는 계산논리학(computational logic)이라는 새 분야를 만들어 내었고, 이미 시험적인 소프트웨어까지 출현하는 단계에 와있다.
거대한 꿈을 가졌던 천재 수학자 튜링은 안타깝게도 42세 생일을 목전에 남겨두고 이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발표되었지만, 음모론에 기반을 둔 다른 설도 있다.
컴퓨터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인간의 삶의 방식을 바꾸면서, 튜링의 업적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또한 합당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튜링 어워드라는 상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전산 과학의 노벨상으로 불린다. 그의 이름이 붙은 도서관이나 길도 많이 생겨났다. 포스텍 캠퍼스 어딘가에도 20세기 문명의 모양을 바꾼 그의 이름을 붙인 장소를 만들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