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다루는 예술, 타이포그래피
글자를 다루는 예술, 타이포그래피
  • 최문경 / 파티 스승
  • 승인 2013.05.22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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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타이포그래피

대학을 졸업하고 타이포그래피 분야에 종사한지 10여 년이 넘은 필자의 아버지는 아직도 타이포그래피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신다. 그래도 계속 물으면 “글자로 뭐 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씀하신다. “글자로 뭐?”라고 되물으면 “디자인?”이라고 하신다.
실제로 타이포그래피는 그리스어 티포스(typos)에서 유래된 ‘활자’를 뜻하는 타입(type)과 ‘그리는 방법’을 뜻하는 그래피(graphy)가 합쳐진 단어로, ‘글자로 디자인하는 것’이라는 대답은 정확한 표현이다. 따라서 타이포그래피는 인류가 문자를 발명했을 때부터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본격적인 발전은 1455년경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낱활자로 인쇄하는 활판 인쇄술을 완성하면서부터였다. 활판 인쇄술이란 납으로 만든 활자에 잉크를 묻혀 글자를 찍어내는 인쇄 방법을 말한다. 이렇게 타이포그래피의 태생은 활판 인쇄술이기 때문에 인쇄술에서 출발하여 발전된 고유의 관습과 표현 언어가 있다. 즉 타이포그래피는 다른 디자인과 달리 활자의 종류, 크기, 굵기, 너비, 각도, 괘선, 빈 공간, 색 등을 디자인에 주어진 자원으로 이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 타이포그래피는 활자의 모양 자체를 디자인하는 ‘글자 디자인’은 물론 손으로 글씨를 쓰는 ‘캘리그래피’까지 그 영역이 매우 넓고 다양해졌지만 타이포그래피라는 놈의 본업은 뭐니뭐니해도 있는 활자를 사용하여 디자인하는 것이다.
부드럽게 잘 읽히는 글, 거슬리지 않는 간판,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운 표지판. 우리 주변에는 요란한 ‘디자인’ 없이 단순히 글자만 나열되어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보기 좋은 타이포그래피 작업들이 많이 있다. 눈에 띄는 화려한 디자인도 타이포그래피 기초공사가 잘 되어있어야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컴퓨터에는 수많은 종류의 글꼴이 있고 소프트웨어는 글자의 크기와 위치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해준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적합한 글꼴을 고르는 기준과 타이포그래피적 판단력이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해졌다. 글자 크기, 글자 사이 간격과 글줄 사이 간격, 글줄의 길이는 적절한지, 큰 글씨로 된 제목에서 특정 글자들이 유독 붙거나 떨어져 보이지는 않는지, 양끝이 맞춰진 글에서 단어 사이의 공간들이 너무 불규칙적이지는 않은지, 지면이 혹시 지루해 보이지는 않는지걖?글자를 다루는 디자이너들은 이 모든 것들을 세심하게 고민하고 수많은 선택과 조정의 과정을 거쳐 글을 보기 좋고 읽기 쉽게 다듬는다. ‘사람에게 있어 타이포그래피는 산소처럼 그 존재가 아예 느껴지지 않아야한다’는 말도 있듯이 타이포그래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노력의 산물이다.
타이포그래피의 기본 목적은 커뮤니케이션이다. 스위스 타이포그래퍼 에밀 루더(Emil Ruder)는 “읽을 수 없는 디자인은 그저 쓰레기일 뿐”이라고 말하며 타이포그래피에 있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다. 글로 의사소통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독성으로 읽기 쉬움을 의미하는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타이포그래퍼들의 숨은 노력들은 이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가독성은 글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소설은 긴 호흡으로 오래 읽는 글이다. 길이가 길어서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글이라면 글줄의 길이를 충분히 확보하고 글줄 사이공간도 넉넉한 것이 독서에 도움이 된다. 반면, 잡지와 같이 호흡이 짧은 글에서는 상대적으로 글줄길이와 사이공간을 짧게 하는 것이 좋다. 배경 색이 글자 색보다 더 어두울 경우에는 글자가 의도보다 더 두꺼워 보일 수 있기 때문에 획이 좀 더 가는 글꼴을 사용하고 글자 간격을 넓혀주면 도움이 된다.
가독성과 유사한 개념으로 알아보기 쉬움을 의미하는 판독성이 있다. 즉 글자가 눈에 잘 띄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개개의 글자 형태를 식별하고 인지하는 과정이다. 먼 거리에서 빠르고 쉽게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 표지판 글자의 경우 판독성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적합한 글꼴을 선택해야 한다. 글자에서 획으로 둘러싸인 안쪽 공간을 ‘속공간’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좁으면 획이 뭉쳐 보여 어떤 글자인지 한눈에 식별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멀리서 보는 글자의 경우 속공간이 넓은 글꼴을 선택하면 판독성을 한층 높일 수 있다.  
타이포그래피에서 적절한 글꼴을 선택하는 것은 건축에 있어 집을 지을 때 견고하고 적합한 기능의 자재를 고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신문과 같이 한정된 공간에 되도록 많은 글을 넣어야하는 경우에는 공간을 절약하면서도 글자가 크게 보이고 읽기 쉬운 글꼴을 선택해야한다. 모바일 기기와 같이 글자를 작게 봐야 하는 환경에서는 크기가 작아져도 뭉개지지 않는 글꼴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글자가 작아지면 활자 안팎의 빈 공간을 채워버리기 때문이다.
타이포그래피에는 가독성, 판독성과 같이 기능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이포그래퍼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는 “타이포그래피는 보고 읽을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들려야 하고, 느껴져야 하고, 체험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타이포그래피는 기능적인 동시에 예술성을 지닌다. 글자의 배치, 배열, 반복, 변형, 무게 변화, 주위 공간 변화, 여백의 활용을 통해 다양한 감정 표현이 가능하고 이는 글의 내용이 가지는 의미를 더욱 증감시킬 수 있다. ‘사랑해’란 말을 작게 썼을 때와 크게 썼을 때, 가는 글자로 적었을 때와 두꺼운 글자로 적었을 때, 모퉁이에 놓았을 때와 정중앙에 놓았을 때, 한번 적었을 때와 열 번 연속해서 적었을 때, 글자 간격을 좁혀서 썼을 때와 많이 떨어뜨려 썼을 때를 상상해 보라. 독자들은 머릿속에 각기 다른 느낌의 타이포그래피를 떠올리며 다양한 깊이의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타이포그래피, 성난 타이포그래피, 익살스러운 타이포그래피, 지적이고 우아한 타이포그래피 등 타이포그래피로도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은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글자들을 보고 읽는다.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편안하게. 타이포그래피는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는 글자를 다루는 예술이다.

 

*파티는 타이포그래피 학교로 학부과정을 배곳, 대학원과정을 더배곳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고, 교수를 스승, 학생을 배우미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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