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치기와 접붙이기; 버림과 채움
가지치기와 접붙이기; 버림과 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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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3.20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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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참 신기롭고 오묘하기만 하다. 지난겨울 동안 마치 봄은 오지 않을 것처럼 동장군이 기세를 떨치었건만, 기어이 찾아온 봄의 화사하고 따사로운 햇살에 만물이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 봄은 우리네의 일상생활에 활력을 준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반듯이 해 줄 뿐만 아니라 자연속의 많은 동식물들이 제 각기 가을의 풍요로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치장하고 멋을 한창 뽐내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봄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만끽하게 해 준다.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것을 보면 봄이 쉽게 오지는 않는 듯싶다. 그래도 수만 년 동안, 겨울의 거친 눈보라와 온갖 시련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 왔고 그때마다 자연은 거의 변하지 않고 자기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시대가 변하고 해가 바뀌면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무엇인가 변하고 주변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더욱이 인간의 손길이 닿는 자연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잃게 마련이다. 크게는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개발이 그러하고, 농부들 또는 개인이 하는 식물에 대한 ‘가지치기’와 ‘접붙이기’가 그러하다. 이러한 데서 인간 세상의 이치를 볼 수 있다.
‘가지치기’는 나무가 웃자라지 않게 하고 오래되어 소출이 없거나 병든 가지들을 쳐 냄으로써 과실 생산을 많이 할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농부들이 터득한 지혜이다.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가 오히려 번성하여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을 차단해 생산 효율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근래에는 ‘가지치기’를 통해 나무의 형태와 속성을 변화시켜 정원수들을 보기 좋고 유용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가지치기’에서 ‘버림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내 안에서 쳐내야 할 가지는 없는가?’라고 항상 물어볼 필요가 있으리라. 하지만, ‘가지치기’는 생살을 잘라내는 아픔을 전제로 한다. 가지가 여물수록, 웃자란 세월의 두께가 두꺼울수록, 상처가 치유되는 게 더디다. 그래서 현명한 농부는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면 아깝다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다. 나중의 더 큰 출혈을 저어하기 때문이리라.
‘접붙이기’는 식물을 번식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예를 들면, 살구나무에 매화나무를 붙여서 매실을 얻는 식의 농사법이다. 이는 우리네 인생의 더함과 보탬 즉 채움의 미학을 알려 준다. 내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타인 또는 다른 사회의 장점을 받아들여 자아와 사회의 발전을 지향해야 할 필요성을 여기서 배울 수 있다.
사람을 키움도 식물을 키움과 같을 것이며 대학 교육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1세기 인류사회는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국가에 이르는 모든 조직에, 역동적인 변화무쌍함에 대응하고 상황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데 필요한 많은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의 유전자가 갑자기 변화되지 않는 이상 현 세대를 살아가는 개인 또는 우리 사회 모두가 이를 잘 감당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이든 대학을 포함한 사회 조직의 차원이든 그 능력의 향상과 발전에 있어서, ‘가지치기’와 ‘접붙이기’ 전략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며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인간사회에서의 ‘가지치기’와 ‘접붙이기’에는 고려할 요소들이 참으로 많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채울지 하는 선택의 논리와, 그에 대한 구성원의 동의 내지는 그 필요성에 대한 처절한 깨달음, 그리고 실천의지 등이 매우 중요한 고려 사항이라 할 수 있다.
  농부가 자기 농장의 과실수에 인위적으로 가한 ‘가지치기’와 ‘접붙이기’는 이윤을 가져다 줄 수도 있고 실패로 끝날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한 책임은 농부 본인에게 있다. 왜냐하면, 나무들은 농부에게 말로서 불평하지 않고 결과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설령 어떤 해에는 ‘가지치기’와 ‘접붙이기’가 풍요로움을 더해 준다 해도, 그 결과가 영원히 그러하리라고 할 증거는 없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자연스러움이 최상의 방책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자연의 현상과 법칙을 볼 때, 주관적 판단에 의한 ‘가지치기’는 사회와 개인의 다양성을 무너뜨릴 수 있으며 지나친 ‘접붙이기’는 개인, 대학,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자기정체성 상실을 초래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살구나무에 매화나무를 접붙이기한 나무는 살구나무인가 매화나무인가, 혹은 매실을 얻기 위한 살구나무에 지나지 않는가? 나아가, 여기서 수확한 매실은 매화나무에서 얻은 매실에 비해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생산의 효율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등이 문제된다.
따라서, 조직과 집단적 차원에서 행해지는 인위적인 ‘가지치기’와 ‘접붙이기’ 행위는 결코 그 결과를 낙관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가지치기’와 ‘접붙이기’는 조직의 리더가 사회전체를 일정한 틀로 바꾸는 논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지치기’와 ‘접붙이기’는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그리고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해져야 한다. 이것이, 해마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봄의 미학 자연의 덕목에서 배워야 할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