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자세히 보기: 루브르 박물관
미술관 자세히 보기: 루브르 박물관
  • 박희숙 / 화가
  • 승인 2012.12.0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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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취향 중심의 왕립 미술관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미술관으로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은 전 세계인이 가장 가고 싶은 곳 중에 하나다. 프랑스의 예술적 자산을 대표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은 원래 프랑스 왕이 거주하던 궁전이었다. 귀족들 위해 있던 루브르궁에 있던 왕립 미술관이 일반인들에게 공개가 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다. 1783년 프랑스 국민회의가 루브르 왕립 미술관을 대중 미술관으로 개조해 처음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개방했다.

   
▲<모나리자> - 1503~1506년 경, 목판에 유채, 77x53

 


루브르 박물관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다. 박물관에서 가장 길게 늘어선 줄만 찾아도 <모나리자>라는 말도 있듯이 전 세계인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작품이다. <모나리자>의 해석이 분분하지만 모델은 피렌체 공화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상인 조 콘다가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의뢰한 것이라는 배경이 가장 유력하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공식 초상화의 우울한 분위기를 제거하기 위해 악사와 광대를 화실로 초청해 모델의 순간적인 표정을 포착해 그린 것으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방식이었다. 당시 미소를 띤 초상화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배경에 있는 돌산과 작은 오솔길과 오른쪽 말라붙은 강바닥이 보이지만 그 뒤에 있는 저수지와 연결이 확실하지 않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황량한 풍경을 좋아했는데 이전에 종교화에서 시도했었던 것으로 인간의 잠재성을 의미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인물을 화면 앞쪽으로 더 가깝게 배치했으며 윤곽선을 강조했던 이전의 다른 화가들의 작품들과 달리 스푸마토 명암법을 처음으로 사용해 풍경과 인물을 구별 짓기 어려울 정도로 일치감을 보여주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이 작품을 의뢰인에게 전해주지 않고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고 프랑스로 이주할 당시에도 가지고 왔다. 후에 <모나리자>는 튈리르 궁의 나폴레옹 개인 침실에 걸려 있다가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져 18세기에 최초로 대중들에게 공개됐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1830년, 캔버스에 유채, 260x325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 중에서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는 작품이 들라크루아가 사명감을 가지고 제작한 작품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샤를 10세의 절대주의 체제에 반발하여 파리 시민들이 일으킨 소요 사태 중 가장 격렬했던 1830년 7월 28일의 장면을 담은 이 작품은 정치적 목적을 담은 최초의 근대회화로 꼽히고 있다. 하늘을 덮고 있는 포화 연기 사이로 여인이 중앙에서 깃발을 들고 민중을 이끌고 있고 옆에 총을 든 어린 소년과 총칼을 높이 치켜든 사람들이 돌과 보도블록, 건축물로 세운 임시 바리게이트를 넘어 전진하고 있다. 화면 오른쪽 포화 연기 사이로 노트르담 성당이 보인다. 혁명 당시 노트르담 성당의 탑에 아침부터 삼색기가 꽂혔다. 여인이 쓰고 있는 모자 프리지아와 오른손에 들고 있는 삼색기는 혁명 당원을 나타낸다. 삼색기는 1789년 루이 16세가 봉기군의 적청색 모표를 자신의 흰색 문장과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다. 이후 자유와 평등, 박애를 의미하는 삼색기는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한다.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는 이 작품에서 여인은 고대 승리의 여신에서 영감을 받아 표현한 것으로 자유의 여신을 상징하며 총을 든 어린 소년은 프랑스 미래를, 모자를 쓰고 총을 들고 있는 인물은 들라크루아로 지식인을 상징한다. 들라크루아는 국민군으로 참여했다.   

   
▲<천문학자> - 1668년, 캔버스에 유채, 51x45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 중에 과학의 변혁 시기를 알리는 작품이 베르메르의 <천문학자>다. 이 작품은 베르메르의 작품 중에 제작년도가 명확하게 적혀 있는 3점 가운데 하나로서 과학사에서 대변혁이 이루어진 시기에 제작됐다. 루이 14세가 파리에 천문대를 건립(1667~1672)하도록 하면서 유럽은 과학의 시대를 맞이했다. 방안에서 머리를 길게 길러 귀 뒤로 넘긴 학자가 책상에 기대고 앉아 손으로 천체의를 돌리면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책상에는 펼쳐진 책이 놓여 있고 책상 덮개로 사용되고 있는 양탄자 옆에는 천문관측의가 눕혀져 있다. 천문관측의는 천체의 각도와 위치를 재는 장치로서 선원들이 별을 관찰하면서 항해하는 데 중요한 도구다. 학자가 돌리고 있는 천체의 왼쪽에 큰곰자리가 보이고 중앙에는 용자리와 헤라클레스자리, 오른쪽에는 거문고자리가 보인다. 별자리는 남자가 천문학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천체의는 1618년 요도쿠스 혼다우스가 제작한 것이며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은 아드리안 메티우스가 쓴 <별들의 탐구와 관찰>이다. 얀 베르베르(1632~1675)는 실내의 모습을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해 카메라 옵스쿠라(암실 장치)를 사용했다. 옷장에 로마 숫자가 적혀 있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완성된 날짜다.

 

   
▲<질> - 1718~1720년, 캔버스에 유채, 184x149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품 중에서 17세기 최고의 인기가 있던 광대를 표현한 작품이 와토의 <질>이다. 당시 ‘질’은 프랑스에서 광대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로서 17세기 곡예사 겸 희극배우였던 질 르 나에에서 나온 말이다. 질과 코메디아델라르테(16~17세기 이탈리아서 유행하던 희극형태)가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다. 무대 위에 광대가 하얀 옷을 입고 팔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청중들을 바라보고 있다. 소매의 많은 주름과 엉덩이까지 내려온 옷은 광대에게 옷이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 채워진 단추는 광대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광대의 코와 뺨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붉게 칠해져 있지만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 고여 있다. 밝고 경쾌한 광대의 이미지보다는 고독하고 서글픈 이미지로 표현했다. 광대 외의 인물들은 이탈리아의 코메디아델라르테에 등장하는 네 명의 캐릭터다. 장 앙투안 와토(1648~1721)의 이 작품은 인물 중에 한 사람이 당나귀로 변하는 ‘다나에’의 초연을 위해서 제작됐다.

 

   
▲<메두사 호의 뗏목> - 1818~1819년, 캔버스에 유채, 419x716

루브르 박물관에서 실제의 사건을 소재로 해 당시 충격을 주었던 작품이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다. 이 작품은 1816년 7월 2일, 일어난 실제 사건을 재현함으로써 낭만주의를 뿌리 내리게 했다. 1816년 뒤루아 드 쇼마레가 지휘하던 왕실 해군 소속 메두사 호가 서아프리카 세네갈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되자 선장은 승선자 149명이 타고 있는 뗏목과 연결된 밧줄을 끊고 도망간다. 세네갈 해안을 12일간 떠돌면서 굶주림과 공포에 떨어야만 했던 승선자들은 아르고스 함대에 발견되어 15명만이 극적으로 구조되었으며 코레아르와 사비니라는 두 명의 생존자가 난파당시 상황을 글을 발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신문을 통해 이 사건을 알게 된 제리코는 자연 재해로 인해 불안과 공포로 광란에 빠진 사람들을 표현하고자 이 작품을 제작한다. 바람에 돛은 부풀어 있고 파도는 금방 뗏목을 덮치려고 넘실대고 있고 하늘에는 잔뜩 먹구름이 끼여 있다. 왼쪽 하단에 두 구의 시체 중 하나는 바다로 서서히 미끄러져 가고 있는데 시체의 모델은 화가 들라크루아다. 화면 왼쪽 수염을 기른 생존자가 아들의 시체 옆에서 넋이 빠진 상태로 앉아 있지만 그와 달리 한 남자가 큰 통 위에 올라가 천을 흔들고 있다. 아들이 죽은 생존자는 절망을, 천을 흔들고 있는 남자는 희망을 나타낸다. 오른쪽 하단 파도에 의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시체는 바람의 방향을 강조하며 부풀어 오른 돛을 설명한다.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는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두 명의 생존자들을 만나 당시 상황을 전해 듣고 실물과 같은 거대한 뗏목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죽은 사람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지역의 병원 시체실에서 시신을 연구하기까지 했다.
루브르 박물관의 규모가 크지만 규칙이 있다. 조각은 무게와 크기 때문에 1층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회화 작품은 천장의 조명을 받을 수 있는 위층에서 전시되고 있다. 또한 작품들은 문화와 학파, 나라 그리고 세기별로 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이 다양한 문화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지만 동양의 작품은 거의 없다. 초기에 귀족 취향 중심으로 루브르 박물관이 운영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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