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티콘
파놉티콘
  • 이승훈 객원기자
  • 승인 2012.11.0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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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미래사회와 파놉티콘, 시선의 권력

나는 너를 본다. 너는 나를 볼 수 있는가. 일방적인 시선, 관찰에서 시작되는 정보의 불균형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감시체계는 많은 영화들(특히 미래사회를 그리는 SF영화)에서 관습적으로 다루어지는 패턴이며 관객들은 작품 속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간극, 양쪽이 가진 정보의 불일치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에서 다루어진 첨단IT기술을 사용한 인간에 대한 정보적인 해부, “이퀼리브리엄”에서 표현된 감시체계로 무장된 전체주의적 제국의 모습, 영화 “가타카”에서의 유전자정보를 통한 인간에 대한 통제와 차별 등 이미 기존의 많은 작품들 속에서 거대권력(보통은 국가로 대표되는)의 인간을 향한 감시와 통제는 앞서 열거한 작품들 외에도 많은 작품들에서 묘사돼 왔다. 물론 최근 몇 년간의 놀라울 정도의 IT기술의 발달로 인해 개인에 대한 사생활, 기본권 침해는 위험한 수준에 다다랐고 이로 인한 논란들 또한 지속적으로 야기돼 왔기 때문에 ‘감시 체계’를 다룬 작품들의 탄생배경을 많은 이들이 ‘IT기술의 발달’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나, 이러한 감시체계, 국가 내에 속한 개인에 대한 통제 및 관리에 대한 시각은 기술로 인해 확장됐을 뿐 이에 대한 시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쓴 미래소설 "1984"


많은 이들이 소설은 모르지만 단어는 인지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감시체계를 논하는 대부분의 글에 포함되는 단어인 “Big brother”는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쓴 미래소설 “1984”에서 처음 등장하며 ‘개개인에 대한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개개인을 통제하는 권력, 사회체계’를 의미한다. 책이 쓰인 1948년 당시의 기술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CCTV와 유사한 개념인 “텔레스크린”이 개개인의 집과 거리는 물론 화장실에까지 설치돼 개개인에 대한 정보를 통제하고 이로 인해 권력을 유지시키려는 모습이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데, 이는 ‘개인의 기본권을 위협하는 기술이 등장했기 때문에 통제사회에 대한 두려움이 시작됐다’라는 시각과는 반대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미 이와 같은 개인을 통제하는 감시체계, 앞으로 설명할 “파놉티콘”의 개념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 이전에 이미 존재해왔으며 단지,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러한 개념이 확산됐을 뿐이다.
17세기 말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은 “파놉티콘”이라는 거대한 감옥 체계를 설계했다. 파놉티콘(Panopticon)이란 ‘모두’를 의미하는 ‘Pan’과 ‘본다’를 의미하는 ‘Opticon’을 합친 단어로 ‘모든 것을 본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감옥은 기존의 감옥들과는 다르게 설계됐는데 중앙의 원형공간에 높은 감시탑을 세우고 이를 항상 어두운 상태로 유지하며 죄수의 방은 이 원형공간을 따라서 배치하되 중앙 감시탑과는 반대로 낮은 곳에 그리고 밝은 상태로 유지시킨다. 이러한 설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시선의 불평등’으로 간수는 원한다면 죄수의 행동을 자유롭게 볼 수 있으나 죄수는 간수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자신의 시선을 통해 알 수 없다. ‘무엇인가를 본다’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그것을 안다’라는 것과 동일선상에 놓아지며, 즉 본다는 것은 보이는 객체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놉티콘과 같은 체계 속에서 이러한 시선의 불평등은 정보의 불평등을 의미하게 되며 이는 정보가 집결되는 소수의 권력, 중앙 감시탑으로의 권력이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체계 속에서 죄수는 이 ‘허구의 시선’, 자신을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이 시선을 내면화하게 되고 이를 통해 스스로 규율과 통제를 받아들이며 나아가 스스로를 감시하게 되기 때문에 ‘통제되는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영화 “이퀼리브리엄”, 소설 “1984”등 에서 묘사되는 미래 사회의 모습에 자유가 억제돼 지극히 침착한(equilibrium의 뜻처럼 지극히 균형적인) ‘전체주의적’ 사회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이러한 감시체계 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인간으로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거대한 감옥 체계 "파놉티콘"

앞서 열거한 것처럼 많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국가의 권력체계에 담긴 파놉티콘의 형태를 묘사하는데 사용됐지만 사실 파놉티콘의 형태는 국가의 권력체계 이외에도 거대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포함된) 모든 시스템에 적용될 수 있다. 공리주의자였던 벤담은 공리주의의 핵심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서 이와 같은 파놉티콘의 형태를 단지 감옥에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와 공장과 같은 시스템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어지는 것이 현재에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기업 내에서 ‘노동자에게 행해지는 감시체계’, 관리대상으로서의 노동자라는 측면이다. 실제로 철학자 미셸 푸코는 공장과 감옥의 연관에 주목해 파놉티콘 내에서 감시와 노동을 통한 규율은 ‘개인에 대한 권력의 통제’가 육체적인 형벌에서 ‘산업자본주의의 인간형에 적합한 영혼에 대한 규율’로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당시, 현재는 ‘산업공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프레드릭 테일러는 산업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노동자의 업무 패턴을 분석하고 시간-동작 연구, 생산직 노동과 기획의 분리 등 다양한 경영, 분석 기법을 활용해 전반적인 노동에 대한 통제와 표준화를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노동자의 노동을 감시하는 체계가 가능해졌고 이 통제를 위한 권력은 소위 ‘화이트 칼라’로 대변되는 중앙관리자들에게 넘어왔다. 이는 산업혁명 당시 그리고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묘사되듯 이후 포디즘에서 ‘conveyor belt’를 통한 대량생산에도 기계를 통한 통제 및 감시의 형태로 이어져 왔으며 대부분의 공장이 지금까지도 파놉티콘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돼 오고 있다.
최근에 와서도 이와 같은 기업 내 감시의 형태는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IT기술로 인해 점차 확장됐다. 상당수 국내 대기업들이 IT기술을 활용하여 전자감시망을 구축하고 직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으며, 2005년 인권상황실태조사 연구용역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기업 중 89.9%의 기업이 인터넷/하드디스크/전화/CCTV/전자신분증/ERP 중 최소 하나의 장비 및 기술을 활용해 직장 내 감시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한다. 물론 지적재산권이 기업의 핵심자산인 요즘의 시대에 산업스파이를 막기 위한 사내 보안시스템의 구축은 필수적이나 이것이 직원들의 근무태도를 감시하기 위한 ‘직장 감시 시스템’ 으로 확장됐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생산효율성과 기업보안을 위한 필수적인 정책’이라고 주장하는 기업의 입장과 ‘사생활 침해’라는 노동자의 입장이 대립돼 논란이 이어져 오고 있다. 파놉티콘을 통해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은 구시대적인 패러다임이며 창의성을 강조하는 현 시대에 있어서 기업 내 감시체계를 확장하는 것은 도리어 기업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반론들도 나오고 있으나, 이러한 파놉티콘의 형태는 이제 공장과 기업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까지 자리를 넓혀 전지구적인 일종의 ‘디지털 파놉티콘’의 형태로 전환되고 있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1990년, ‘감시사회’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우리는 더 이상 유폐된 채 작동하는 통제사회가 아닌, 순간적인 커뮤니케이션과 지속적인 통제로 작동하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는 앞서 설명한 공장과 감옥 등 제한된 장소에 국한되어 있던 파놉티콘의 형태가 열린 형태로 일상에 침투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유망한 미래기술로 손꼽히는 ‘클라우드 컴퓨팅’과 ‘빅데이터 분석기술’은 이를 뒷받침하며 ‘디지털 파놉티콘’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술들로 클라우드 컴퓨팅을 통해 이용자의 모든 정보는 인터넷 상에서 중심서버에 모두 저장되고 빅데이터를 분석함을 통해 이용자에 대한 실시간 감시, 즉 지속적인 ‘허구의 일방적인 시선’은 모든 사람들을 향하게 된다.
혹자는 “사이버스페이스는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선사할 독립공간”이라고 말했다. 또한 기존의 현실세계에서 굳건했던 ‘파놉티콘’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통제했던 통제사회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발달된 IT기술들로 인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역 파놉티콘(사회구성원을 통제했던 권력층을 통제의 대상이었던 시민들이 역으로 감시하는 체계)’을 구성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적인 시각 또한 존재해왔다. 그러나 이는 사이버스페이스와 현실세계와의 역학적 관계를 무시한 시각이었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모바일 기기와 SNS의 확산으로 인해 개개인의 일상적 정보가 ‘자율적으로’ 사이버스페이스에 업로드됨에 따라서 사이버스페이스는 현실세계를 감시하는 파놉티콘의 확장판, 무한한 시선을 가진 디지털 파놉티콘을 완성시키는 시발점이 됐다.
벤담은 단지 건축적 구조만을 사용하여 파놉티콘을 완성하려 했으나 현시대에 와서 그것은 IT기술을 활용해 ‘허구의 시선’을 통해 모든 일상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해 재구성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의 형태에까지 이르렀다. 미래 사회가 많은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회색빛의 전체주의 사회, 디스토피아적인 미래가 될 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으나, 현재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언제든지 필요하다면 ‘허구의 시선’은 자신을 드러내고 현실세계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