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부도체
위상부도체
  • 지승훈 / 물리 교수
  • 승인 2012.10.1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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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이 다른물질, 위상부도체의 성질과 특징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 캠퍼스를 두르며 동서로 나 있는 뱅크로프트 거리를 걷다 보면 얼핏 투박하지만 맵시가 있는 콘크리트 건물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버클리대의 미술관이다. 이곳이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 화가이자 뛰어난 선생인 한스 호프만을 기념하여 지은 건물이라는 것을 이 대학 구성원들도 잘 모르는 듯하다. 그는 색채와 형태가 사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대상이 되고 이들이 엮어 내는 심미에 주목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 사물, 세상이 존재의 본질, 근간을 제대로 표현해주고 있는지 어떻게 확실할 수 있겠는가? 본질은 언어와 이성이 닿기 어려운 저 너머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 세상뿐 아니라 자연 세계도 본질적 특성은 구체적 외형이 아니라 내재된 무엇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왕왕 수학이라는 학문에 종사하며 가끔 물리학을 하기도 한다. 컵에 손잡이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구멍 난) 도넛 혹은 탁구공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같은 위상체라고 얘기한다(그림1). 이런 위상 특성은 연속적 변형에 의해 바뀌지 않는다. 물질 내의 전자와 원자들은 전자기력으로 상호작용하여 복잡한 에너지 스펙트럼을 형성하는데, 여기에 기하학적 위상과 같은 본원적(예를 들어 원자의 작은 움직임에 변하지 않는) 성질이 존재할까?
일정한 격자 구조를 갖는 고체는 다양한 대칭성을 가지며 이들의 집합은 군을 형성한다. 이러한 대칭성은 전자, 원자들 간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발생하는 에너지 스펙트럼에도 강한 제약을 준다. 대칭성과 상호작용 의해 고체의 에너지 스펙트럼이 만드는 구조를 통상 에너지띠 구조라고 부른다. 국수 가락처럼 어지럽게 얽혀있는 에너지 띠 구조는 실공간(real space)이 아니라 운동량 공간(momentum space)에서 표현되며 수학의 좀 고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에너지 매니폴드라 하겠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체의 여러 성질들, 도체/부도체의 전기적 특성, 수정의 투명함, 금의 반짝임 같은 광학적 성질은 이러한 에너지 매니폴드가 실공간에 투영된 결과이다. 아인슈타인 이후로 물리학은 구체적인 사물의 동역학에서 사물과 상호작용이 가지는 대칭성과 그것의 자발적/비자발적으로 깨짐으로 이해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강자성은 스핀의 회전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진 상태로 인지한다. 국소적 대칭성 깨짐에 대한 논의는 많이 있었지만 고체의 에너지 매니폴드가 다양한 위상구조와 위상 불변수(topological invariant)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 또 그로부터 발생하는 물리적 특성은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강한 자기장이 걸렸을 때 생기는 양자홀 현상을 위상 불변수 관점에서 다루어지기는 했다).
위상부도체는 전자의 상대론적 효과가 에너지 띠 구조를 변화시켜 새로운 위상 구조를 갖게 되어 발생한다. 고체내의 전자 상태는 대부분의 경우 소위 고전적 양자역학에 의해 충분히 기술할 수 있지만, 원자의 크기가 커지게 되면 상대론적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스핀-오비트 상호작용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전자의 스핀(스핀에 의한 자기모멘트)과 전자의 전하 운동이 만들어내는 자기장이 상호작용하여 발생한다. 보통 스핀-오비트 상호작용의 크기는 매우 작으나, Pb, Bi 등에서 크게 나타난다. 스핀-오비트 상호작용은 마치 자기장과 같은 힘을 전자에 주는데, 재미있는 것은 전자의 스핀에 의해 힘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전자의 운동 방향이 같더라도 스핀 방향이 반대이면 정 반대 방향의 힘을 받아 움직이게 된다. 예를 들어 같은 방향으로 전자가 움직일 때 + 스핀은 오른쪽, - 스핀은 왼쪽으로 힘을 받게 된다(그림2). 전자는 결과적으로 스핀이 어느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게 되며 이러한 현상을 스핀홀 효과(spin-Hall effect)라 부른다.
이 스핀-오비트 상호작용을 섭동으로 생각할 때, 전자의 에너지 상태가 변하게 되며 몇 몇 반도체의 경우 섭동에 의한 에너지 변화가 반도체가 갖는 고유의 에너지 갭보다 크게 되어, 에너지띠의 역전 현상이 발생한다. 이러한 역전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에너지띠가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구조, 위상 특성이 바뀌게 되며 이러한 물질을 위상부도체라 부르게 된다. 대표적인 위상반도체로 Bi2Te3,Sb2Te3 등이 있다.
그렇다면 위상특성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물질을 붙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전자가 일반부도체에서 위상부도체로 움직여간다고 하면 서로 다른 위상을 연결해주는 무엇인가 두 물체의 계면에 존재해야 한다. 위상부도체에서 스핀-오비트 상호작용에 의해 에너지 띠 역전이 일어났으므로 계면에서 전도띠(conduction band)와 가전자띠(valence band)를 연결하는 새로운 상태가 존재해야 하며, 일반부도체의 어떤 상태에 존재하던 전자는 이 상태를 통해 에너지 띠 역전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위상부도체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표면 혹은 계면에 선형 에너지 관계를 만족하는 전자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앞서 설명한 데로 운동 방향과 스핀 방향에 의해 스핀-오비트 상호작용에 의한 힘이 달라지므로 표면(혹은 가장자리)에는 서로 반대로 움직이며 스핀의 방향이 정 반대인 두 개의 전자 상태가 쌍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전자의 운동방향과 스핀의 방향이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얽혀있게 된 상태를 키랄 상태라 부른다.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전자의 스핀은  +, 왼쪽으로 움직이는 전자의 스핀은 - 방향이 된다. 이 표면 키랄 상태의 다른 특징은 질량이 0이라는 점이다. 에너지 관점에서 얘기하자면 에너지와 운동량이 선형 관계를 이루고 이 때문에 에너지 스펙트럼의 모양이 고깔 모양을 이룬다(이 고깔 형태의 키랄 에너지 상태를 Dirac cone이라 부른다). 
쉽게 표현하자면 위상부도체는 내부는 부도체, 표면은 이러한 키랄 상태에 의해 전도가 이루어지는 도체의 성질을 가진다(그림3). 위상부도체를 둘로 쪼개더라도 새로 형성되는 표면은 역시 도체의 성질을 갖게 된다. 보통의 물질이 도체, 혹은 부도체의 한 가지 전기 특성을 갖는 것에 비교하면 매우 특이한 점이다. 전도 키랄 상태의 존재는 물질의 위상특성에 의해 결정되므로 원자의 움직임 등의 섭동에 사라지지 않는다. 자 이 키랄 전자가 움직이고 있을 때 (자성이 없는) 불순물이 있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리에서 이런 경우를 불순물 산란이라 부르는데, 특이하게 키랄 전자의 경우 산란에 의해 되돌아가는 성질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유는 앞서 얘기한 대로 만일 뒤로 움직여 가려면 스핀의 방향이 반대로 변해야 하는데 비자성 불순물에 의해서는 이런 스핀 역전 현상이 발생할 수 없다. 따라서 불순물 산란에 의한 저항이 매우 작아지게 된다. 또한 키랄 상태에 있는 전자는 고에너지 물리에서 다루어지던 가상의 입자 ? 마요라나 페르미온, 엑시온 등-를 고체물리의 낮은 에너지 영역에서 검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고, 스핀트로닉스 응용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 랩(Computational Nanomaterials Physics Lab)은 지난 수년간 위상부도체 특성이 실제 물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왔다. 특히 비휘발성메모리 소자로 쓰일 수 있는 상전이물질 (Phase change materials)에서 위상부도체 특성이 전기 전도와 원자구조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Ge-Sb-Te (GST)로 이루어진 상전이물질은 온도가 변함에 따라 비정질, 면심입방, 육각격자 구조를 갖는데 원자구조에 따라 급격한 전기전도도의 변화를 보인다. 특이한 점은 비정질-정질의 상전이가 수십 나노초로 매우 빠르게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빠른 상전이와 전기전도도의 변화를 이용하여 차세대 비휘발성 메모리 소자로 관심을 끌고 있다. 비정질 상태의 원자구조, 화학결합을 이해하기 위해 동역학 시뮬레이션과 EXAFS 등을 통해 많은 연구가 있어 왔지만 빠른 상전이의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여 구체적인 원자구조가 아니라 제멋대로인 원자구조 뒤에 뭔가 숨겨진 대칭성이나 특성이 있지 않을까 추정하였다. 특히 Ge-Sb-Te가 특정한 적층 구조를 이룰 때, 위상부도체 특성을 갖는 Sb2Te3단위를 포함하므로 GST 상전이 물질은 위상부도체를 품는 어떤 새로운 상태가 아닐까 생각했다. 즉 일반부도체와 위상부도체가 이루는 초격자 적층 구조를 생각하고 이들의 계면에서 형성되는 키랄 전자 상태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위상 특성을 이론 연구를 통하여 밝혀냈다 (그림4). 특히 키랄 상태가 일의적인 편광 배열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석의 극성과 같이 다양한 정렬 상태를 가질 수 있음을 최초로 제시하고 키랄 상태의 편광 정렬에 따라 초격자 적층구조의 위상특성이 결정됨을 보였다. 이를 간단한 수학적 비유를 하자면 두 개의 뫼비우스 띠를 연결할 때 생길 수 있는 띠의 종류를 따지는 것과 같은 문제라 하겠다. 우리의 연구가 상전이물질의 전기특성과 원자구조 변화의 이해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자연은 우리 삶의 진정한 스승이다. 복잡하고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 삶의 가운데에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으며 우리는 그에 집중해야 함을 깨닫게 한다.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우리 곁으로 왔다. 낮의 하늘은 푸른빛으로 넘치고 밤은 풀벌레 소리로 가득하다. 나와 너의 다름 속에 그 둘을 이어주는, 가늘지만 강한 끈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