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후 60년을 살아야 할 학생들의 교양교육
향후 60년을 살아야 할 학생들의 교양교육
  • 박상준 / 인문 교수
  • 승인 2012.06.07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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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널리 읽히는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는 ‘인생시계’라는 개념이 나온다. 우리의 80년 인생을 24시간으로 환산해보는 것인데, 그 결과는 놀랄 만하다. 대학 초년생인 20세는 오전 06시 시점에 해당되고,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30세라야 겨우 아침 09시에 해당되며, 은퇴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고들 여기는 50세라 해도 인생시계는 고작 오후 3시를 가리키는 까닭이다. 오후 세 시경에 오늘 하루를 뭔가 의미 있게 만들어볼까 하여 각종 이벤트를 궁리해 보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보면, 50세가 겨우 오후 세 시임을 알려주는 인생시계란 개념은, 현재에 급급해 있는 우리들에게 긴 안목으로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인생시계’ 개념이 잊히지 않는 것은 그와 비슷한 생각을 줄곧 해왔기 때문이다. 교단에 설 때마다 나는, 내 강좌의 내용과 형식이 앞으로 60년을 더 살게 될 수강생들의 ‘길고 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의식한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궁리하고 공부하면서 다소간 안정적인 틀을 갖추고 있지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제나 새롭게 고심한다. 학사제도상 교양교육으로 분류되는 교과들을 운영하면서, 내가 학생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 그들에게서 일깨워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학기마다 강좌마다 진지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20년 넘게 교단에 서 왔으면서도 여전히 이러한 데는, 포스텍의 인문학자로서 다음과 같은 기막힌 질문들을 끊임없이 받는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된다. 항상 접하는바 ‘교양과목인데 왜 이리 수업 로드가 큽니까’라는 항의성(!) 질문이나 국문학 전공이라니 소설을 쓰느냐는 애교 있는 물음, 인문학 교수도 연구를 하느냐는 무례하기 짝이 없지만 솔직한 질문 등이 그것이다.
이 기막힌 질문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나의 문제의식이 지속되는 데는 공통의 지반이 있다. 바로 ‘우리 사회에서 대학의 교양교육이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따라서 교양과 교양교육의 의미를 짚어보고 교양교육의 바람직한 실현 가능성을 함께 생각해보는 일은 언제든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게 된다.
교양은 ‘학습과 지식을 축적해가는 과정을 통해 인격을 형성하는 것, 개성 있는 인간이 자아를 실현해가는 과정’ 혹은 ‘일정한 문화와 사상을 체득하고 그것을 통해 개인이 익힌 창조적 이해력과 지혜’ 등으로 이해된다. 같은 맥락에서 ‘교양교육(liberal education)’은 도그마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인, 사회적인 효용성에 구애받지 않고 독립된 자유로운 인격체가 되는 데 필요한 자질을 키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서경식 외, 『교양, 모든 것의 시작』, 노마드북스, 2007 참조). 요컨대, ‘공동체의 삶에 요구되는 지혜를 갖춘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개인 주체’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구현하는 것이 교양교육의 목표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교양교육과정으로 개설되는 한두 강좌를 통해 교양을 가르치거나 교양교육의 목표를 성취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이러한 취지의 교양교육은, 다양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수준 높은 강좌들을 학생들이 충분한 기간에 걸쳐 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교양교육이 함양하고자 하는 교양을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행하는 교양 프로그램의 교양과 혼동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정은 자명하다.
교양교육의 참된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 더하여 우리대학이 이공계 연구중심대학이라는 점을 피상적으로 앞세우면, 교양교육에 신경을 쓰는 수고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유혹에 굴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이 대학인 이유가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는 것이라는 엄정한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교양교육의 문제는 어느 대학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21세기를 이끌 과학기술계 리더를 배출하려는 우리대학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교육하는 학생들은 졸업 후 2, 30년간 이공계 전문인력으로 활동하다 말 소모품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 앞에는 무려 60년 이상의 미래가 펼쳐져 있으며 그 기간을 그들이 어떻게 사는가가 우리 사회의 앞날을 좌우하게 된다. 따라서 큰 틀에서 볼 때 우리 교육의 목표는, 우리 학생들이 전공지식을 잘 갖춘 과학기술분야의 전문가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차세대 리더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졸업생 개개인의 인생의 맥락에서 보자면, 그들의 삶이 랩에만 갇힌 ‘논문 생산 기계’의 양상을 띠고 그에 따를 경제적 보상에 도취되는 ‘돈 버는 기계’에 그치게 함으로써 은퇴 후 2, 30년의 세월 동안 인생의 공허를 맛보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포스테키안들 모두가 전국에서 선발된 우수한 인재들이므로, 이들 각자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격을 갖춰 스스로의 삶을 풍요롭게 함과 동시에 공동체의 안녕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중차대한 의무이다.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교양교육 체제의 강화가 필수적이다. 교양교육 강화의 첫 단계는, 교양교육이 전공교육의 단순한 보조가 아니라는 점과 교양교육의 발전 방향이 이공계 교육과의 어설픈 융합에서 찾아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 대학구성원의 의식에 깊이 각인됨과 동시에 교육 시스템에 충실히 구현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전공공부에 지친 학생들의 흥미를 돋우며 인간과 사회에 대한 한두 가지 지식을 전수하거나, 이공계열과는 다른 사유방식을 접하게 함으로써 창의적 사고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거나, 강의 주제 등에서 이공계와의 융합(?)을 시도하는 등의 교양교육의 소극적인 양상이 지양될 수 있다.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근간으로 하는 동양의 전통적 사유 틀을 빌려 말하자면, 자연의 자취인 천문(天文)을 연구하는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취인 인문(人文), 사회의 자취인 지문(地文)을 탐구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또한 그 자체의 깊이를 갖추고 교육될 수 있을 때, 교양교육의 진정한 효과를 바랄 수 있다 하겠다. 교양교육이 전공교육의 보조자 위치에서 학습자의 비위를 맞추며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본연의 깊이를 드러내며 충실히 수행’될 수 있을 때, 그러한 교육 시스템이 구현되고 그 의의가 대학구성원 모두에게 공유될 때, 전공교육과 교양교육 효과의 진정한 융합 또한 긴 미래를 살아갈 학생들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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