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적 자기조립
화학적 자기조립
  • 황일하 / 화학 연구교수
  • 승인 2012.05.23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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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적 자기조립은 어디까지 추구할 수 있는가?
   
지난 2005년 Science 지에서는 창간 125주년을 맞이하여 ‘인류가 풀지 못한 난제(難題) 125가지’를 선정했고, 그중에서 보다 중요한 25가지를 각각 한 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소개했다. 이 25가지 난제 중에는 ‘우주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물리 이론은 하나로 통일될 수 있는가?’, ‘생명의 기원은 무엇인가?’, ‘인간의 수명의 한계는 얼마인가?’와 같은 물리, 생명 분야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들과 더불어 화학분야에서는 ‘화학적 자기조립은 어디까지 추구할 수 있는가? (How far can we push chemical self-assembly?)’라는 것이 대표적인 난제로 선정되었다. 자기조립이란 무질서하게 존재하던 구성요소들이 외부의 지시 없이 구성요소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적인 구조나 형태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까운 예로, 우리 몸은 분자에서부터 세포, 조직, 장기에 이르는 여러 단계의 자기조립을 거듭하며 형성된 고도로 복잡한 자기조립체이다. 최근 자기조립에 대한 연구는 분자 간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를 넘어 생명활동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거나 나노물질 또는 나노구조를 만드는 실질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등 더 이상 화학분야에만 머무르지 않고 점점 더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자기조립과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표적인 과학자 중 한 사람이 본교 화학과/첨단재료과학과의 김기문 교수이다. 김 교수는 그동안 ‘어떻게 하면 분자를 자기조립해 원하는 구조, 성질 및 기능을 가지는 초분자체 또는 물질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하여 새로운 인공수용체인 쿠커비투릴의 초분자화학을 정립하였고, 나노 구조체 및 나노 다공성 결정물질 등의 개발을 통해 자기조립 및 초분자 화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였다.
김 교수는 1990년대 중반부터 쿠커비투릴(cucurbituril) 이라고 하는 인공수용체를 단위체로 이용하여 ‘분자목걸이’, ‘분자스위치’ 같은 나노미터 크기의 초분자체를 자기조립을 통해 합성함으로써 그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2000년 쿠커비투릴 동족체 합성과 2003년 직접치환에 의한 쿠커비투릴 유도체 합성 등을 통해 분자기계, 인공이온채널, 리포솜 및 수화 젤의 합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를 보였으며, 이를 이용한 물질 분리, 센서, 표적지향형 약물전달법 등 나노와 바이오 기술 개발에 그 기능과 용도를 넓혀 왔다. 또한, 자연계에 존재하는 물질 중에서 가장 강한 비공유 상호작용을 한다고 알려진 아비딘-바이오틴 복합체와 비슷한 결합력을 보이는 초분자 복합체인 쿠커비투[7]릴과 페로센 유도체를 고안, 합성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세포막 단백질을 선택적으로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쿠커비투[7]릴-페로센 복합체는 합성과 화학적 조작이 쉽고 유기용매 조건하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서 기존에 아비딘-바이오틴 복합체가 사용되던 바이오 칩, 바이오 센서, 면역 분석, 항원 정제 등의 분야뿐 아니라 새로운 물질의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쿠커비투릴이 부착된 표면에 페로센 유도체가 도입된 효소를 고정하여 이를 바이오센서로 사용할 수 있고, 이 초분자 복합체를 이용하여 물에서도 강한 접착력을 유지하는 새로운 접착제를 개발할 수 있다.
최근에는 자기조립을 통해 고분자 나노캡슐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용액에 녹아있는 여러 개의 중합 가능한 작용기를 측면에 지닌 원판형의 단량체에 ‘자외선’을 쬐어주면 분자들이 이차원적인 면으로 연결되어 얇은 판상의 고분자 ‘조각’이 형성되고 이 조각이 어느 크기 이상 되면 구(球) 형태를 이루려는 성질을 이용, ‘자발적으로’ 캡슐이 형성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림 1). 다른 첨가제를 사용하거나 주형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나노캡슐 제조의 새로운 개념으로서 용매를 바꾸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노캡슐의 크기를 50~600nm까지 조절할 수 있다. 또한, 반응 조건을 조절하여 구 형태가 아닌 단분자 두께의 이차원 고분자를 만들 수도 있음을 최근 실험을 통하여 확인했다. 이 방법은 쿠커비투릴 뿐만 아니라 프탈로사이아닌이나 포피린과 같은 물질로도 유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며, 이방형의 단량체를 사용하면 도넛이나 튜브 형태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고분자 나노 물질도 만들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자기조립을 통하여 다양한 나노 물질을 만드는 연구는 그 자체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며, 이러한 방법ㆍ재료로 만들어진 나노캡슐, 이차원 고분자 및 다른 형태의 고분자 나노물질들은 광역학 치료법이나 암세포 이미징, 태양전지, 유기발광소자, 유기박막 트랜지스터, 전계효과 트랜지스터 등에 광범위하게 응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김 교수 연구진이 이룩한 또 다른 성과로 2000년 Nature 지에 발표한 논문은 자기조립을 이용하여 키랄 나노 다공성 결정물질을 합성하고 이의 키랄 촉매로의 응용을 보인 것으로, Watson과 Crick의 DNA 구조, Kroto와 Smalley 의 풀러렌의 발견, Nicolaou의 택솔의 전합성 등과 더불어 지난 1950년부터 2000년 사이에 Nature 지에 발표된 화학 관련 논문 중에서 ‘주목할 만한 논문 35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김 교수는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최근 정부에서 국제과학비지니스벨트의 핵심 기관으로 설립한 기초과학연구원(Institute for Basic Science, IBS)이 1차로 선정한 10명의 연구단장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자기조립 및 초분자화학에 대한 연구는 분석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연구는 대부분의 경우 잘 정제되고 제한된 환경하에서 꼭 필요한 구성 요소들만을 사용하고, 한두 가지 상호작용을 이용하여 예측 가능한 구조물을 만드는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매우 다양한 구성물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여러 가지 반응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그 결과물 또한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자연계와 비교한다면, 기존의 자기조립에 대한 연구결과는 자연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자기조립과 그 결과물들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기존의 방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복잡한 환경’ 하에서의 자기조립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복잡한 환경이라 함은 자연계와 같이 다양한 구성물들이 복잡하게 서로 얽혀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환경을 말한다.
이러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서 논의하고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필수적인데, 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장으로 선정된 김 교수는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복잡계 자기조립 연구단(Center for Self-assembly and Complexity)’을 이끌 계획이다. 이 연구단에서는 자기조립에 대한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지금까지 주로 연구되었던, 잘 정제되고 제한된 환경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계와 같이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섞여 있는 복잡한 환경 하에서의 자기조립에 대한 연구를 하며,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특정 변수를 조절함으로써 자기조립체에서 우리가 원하는 성질이 발현되도록 하거나, 그러한 성질을 나타내는 물질을 만들고자 한다 (그림 2).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진다면 분자를 조작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탁월한 성질과 기능을 갖는 분자 집합체 또는 재료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물질은 암을 조기에 진단하거나 치료하는 일, 태양에너지를 이용하여 수소와 같은 청정에너지를 생산하거나 저장하는 매체를 개발하는 일 등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복잡계에서의 자기조립에 대한 연구는 자기조립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통하여 ‘생명의 화학적 근원’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의 이해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며,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진다면 맨 처음에 소개한 ‘화학적 자기조립은 어디까지 추구할 수 있는가?’라는 명제에 대해 어느 정도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