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학과 우문우답(愚問愚答)
대중문학과 우문우답(愚問愚答)
  • 조성면 / 문학평론가, 인하대BK연구교수
  • 승인 2012.05.02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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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학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대략 난감’한 물음이다. 단순하고 평범한 질문이지만 답변은 언제나 상투적이고 궁색할 수밖에 없음으로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네이버지식인(in)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천하의 ‘애정남’도 시원하게 답해 줄 것 같지 않다. 이럴 경우,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우선 이 물음은 질문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이거나 아니면 아예 질문 그 자체로 다시 돌아가 보는 것이다.
물론 그러다 망한 인간도 있다. 문학전공자로서 매우 궁금한데 그 어떤 학자에게서도 답변을 들을 수도 없었고 또 참고도서도 없어 내친 김에 주제를 바꿔 논문도 써보고 또 평론도 쓰다 보니 어느새 대중문학을 연구하는 사문난적이 됐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끔찍한 축복이며 즐거운 지옥이었다.
선택의 폭을 또 좁혀본다. 해답을 찾고 정의를 시도하기보다는 질문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보는 방식 곧 질문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을 문제화하는 것이다. 즉 사과에 대해서 탐색하고 고민하기보다는 직접 사과를 먹어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 문학 동네의 아비투스(habitus)는 조금 우려스럽다. 예를 들어『춘향전』을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없어도 『춘향전』을 제대로 읽은 대한민국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지식’과 ‘상식’은 있으되, 정작 ‘독서’와 ‘체험’은 없는 것이다. ‘읽은’ 사람보다는 ‘본’ 사람이 압도적 다수일 터이고, 설령 읽었더라도 어떤 텍스트였느냐가 또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읽지 않고도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작품이 너무 유명하고 내용을 잘 알고 있기에 읽었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대중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잘 알고 있고 익숙하지만, 사실은 제대로 모르는. 마치 우리 자신이 그 누구보다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또 설명할 수도 없는 것처럼. 사과를 먹어 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벼운 테스트를 해보자. 다음 임의의 목록 가운데서 읽어 본 작품은 무엇인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ㆍ카렐 차펙의『R. U. R.』ㆍ어슐러 르귄의 『어둠의 왼손』ㆍ필립 딕의 『전기양은 안드로이드를 꿈꾸는가』ㆍ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ㆍ톨킨의『반지의 제왕』ㆍ김용의『영웅문』ㆍ마쓰모토 세이초의 『북으로 간 시인 임화』ㆍ박태원의『삼국지』ㆍ듀나의『면세구역』ㆍ김탁환의『방각본 살인사건』ㆍ좌백의『대도오』ㆍ이영도의『드래곤라자』 또는『눈물 마시는 새』 등등. 엄선된 앤솔로지도 아니고 거의 자유연상법에 가깝게 무작위로 열거한 것이지만, 여기서 최소한 몇 편은 읽었어야 얘기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아직 독서공화국의 진정한 시민권자는 아니다. 그러니 질문을 앞세우기보다 우선 검증된 작품들부터 읽어보고 말하자! 그리고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대중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앞서 이 질문에 대한 기왕의 답변들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 질문은 무엇(혹은 누구)을 위한 질문인지 따져본다. 그래야 대중문학은 뻔한 공식을 반복하는 공식문학(formula literature)이니 사회적 갈등을 봉합하고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마비시키는 사회적 시멘트(social cement)니 창조적 예술정신을 좀먹고 대중에게 영합하는 문화상품에 지나지 않다느니 하는 통속적 이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대중문학은 특별한 텍스트 해독(decoding)의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독자에 대한 인터페이스가 좋으며 쉽고 재미있는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지독한 생활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원의 비둘기를 잡아 끼니를 해결하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나간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영어 과외교사로 버티면서 불멸의 걸작을 남긴 제임스 조이스 같은 예술적 열정과 실험정신을, 여기에서는 목격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문학을 향해 언로가 막히고 국가의 폭력이 횡횡하던 원시시대 문학을 통해 인권을 옹호하고 이에 저항했던, 또 언론과 사서(史書)를 대신하여 시대상을 담아내고 폭로하던 참여정신을 왜 보여주지 못하느냐는 무자비한 잣대를 들이밀지는 말자. 대중문학도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기여하고 간여하면서 또한 참여해왔다. 그리고 대중문학도 수많은 불후의 스테디셀러와 명작을 만들어냈다.
그러면 대중문학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여기서 조지 딕키(George Dickie)의 표현을 빌려 말해본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예술인 것처럼 대중문학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바로 대중문학이다.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란을 잠재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동어반복적 정의는 명쾌하고 후련하지만, 꼭 그만큼의 아쉬움도 남는다. 자칫 치열한 탐색과 다양한 사고의 가능성을 가로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학은 ‘사이’에 있다. 여러 정의들 사이, 독자와 작품 사이, 다양한 논의와 담론들 사이에. 그리고 그것은 아주 같지도 않으면서 전혀 다르지도 않은 스토리, 자기시대보다 지나치게 앞서 있거나 너무 뒤처져 있는 시간 혹은 사고들, 그리고 늘 되풀이되는 가짜 솔루션 행복한 끝내기(happy ending) 등 장르 정체성과 특징의 명료함으로 ‘장르문학’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그것은 작품이자 상품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 문학의 딜레마와 처지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이 불만족스럽고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민한 사회학적인 장르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문학과 소통의 문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혹은 작품성과 상품성의 대립과 분열이라는 현대 문학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하이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한 문학의 정체성과 그 혼돈을 날카롭게 재현하기도 한다. 예컨대 『삼국지』처럼 게임ㆍ만화ㆍ드라마ㆍ영화로 만들어졌을 경우 이런 파생텍스트들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어떤 장르에 귀속시켜야 할 것인가, 또 과연 이것들을 문학으로 볼 수 있는가하는 복잡한 존재론적 물음들이 그러하다.
이제 마무리짓자. 대중문학은 무엇인가란 질문은 애초부터 대답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또는 오로지 질문의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그 무엇일는지도 모른다. 계절의 여왕 오월! 이 화려한 계절에 이 소식을 그 누구에게도 묻지 말고 맛난 사과를 먹으며 박범신의 소설 『은교』를 꼭 한번 읽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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