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 당신의 책꽂이엔, 과학 도서가 있습니까?
[문화기획] 당신의 책꽂이엔, 과학 도서가 있습니까?
  • 박지용 기자
  • 승인 2011.01.01 0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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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도서 시장과 베스트 셀러

대중에게 사랑받는 ‘스테디 셀러’ 필요

포스테키안이 뽑은 과학 도서 ‘만들어진 신’ 
아직까지 미약한 출판시장 앞으로 성장 기대

 수학ㆍ과학을 좋아해 이공계열 대학으로 진학한 A군의 책꽂이는 전형적인 ‘공돌이’의 책꽂이다. 과학 관련 잡지나 사전 등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과제나 수업 유인물이라든지 혹은 두터운 전공도서들이다. 다른 책은 읽지 않느냐고 묻자 “전공도서 읽기도 벅차서 평소 학기 중에는 독서를 할 틈이 나지 않아요. 동아리 등 다른 활동도 신경쓰다보면 방학이 되어서야 겨우 책을 읽을 수 있죠”라고 말했다. 

 같은 이공계 대학생인 B양은 어릴 때부터 ‘과학 콘서트’, ‘코스모스’ 등 과학 도서를 읽기 좋아해 지금도 틈틈이 책을 읽고 있다. 다른 인문 도서보다 과학 도서를 더 좋아하는 이유로 B양은 “이런(과학 도서) 책들을 읽다보면 평소에 딱딱한 전공서적도 재밌게 읽을 수 있어요. 특히 전공분야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 공부에 자극을 받기도 해요”라고 답했다.

 두 학생의 예는 픽션이지만 대중들이 과학 도서에 대해 갖고 있는 대표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까진 인문ㆍ사회 분야의 도서에 가려 과학 도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진 않다. 하지만 ‘과학콘서트’, ‘코스모스’ 등과 같은 과학 도서를 통해 과학에 흥미를 가질 수 있고, 특히 이공계 학생들에게는 이런 책들이 따분한 전공서적으로부터 머리를 식힐 수 있는 활력소 역할을 해주곤 한다.

과학 도서 베스트셀러

 국내 대형 인터넷 서점 Y사가 선정한 과학 도서 베스트셀러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책들이 대다수다. 2010년 베스트셀러 순위로는, 1위에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정재승 저), 2위에 ‘위대한 설계’(스티븐 호킹 저), 3위로는 ‘이기적 유전자’(리차드 도킨스 저)가 차지했다. 그 외에도 ‘코스모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등이 매년 베스트셀러를 넘보고 있다. 

포스테키안과 과학 도서

 우리대학 학술정보처에서 2009년 발표한 ‘포항공대 학생들을 위한 독서권장도서 100선’ 중 ‘과학/기술’ 부문에는 ‘9가지 크레이지 아이디어’(로버트 에를리히 저) 외 31 종의 과학 도서들이 선정되어 있다. 이 선정도서의 대출현황을 보면, ‘만들어진 신’(리차드 도킨스 저)이 총 92회 대출되어 압도적으로 많은 대출 기록을 세웠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리차드 도킨스가 쓴 이 책은 과학과 사회학, 역사적 사례를 통해 창조론을 비판하고 있다. 그 외에 ‘통섭 : 지식의 대통합’(에디워드 윌슨 저)이 38회로 2위, ‘코스모스’(칼 세이건 저)가 37회로 3위를 차지했다.

과학 분야 도서 출판시장

 현재 과학출판물 시장은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 대한출판협회의 통계자료 ‘도서 분야별 출판 시장 규모 추정액(2007년)’에 의하면 13개 분야 중 순수과학 분야가 13위(300억 원), 기술과학 분야가 5위(2,000억 원)를 차지했다. 타 분야, 특히 문학(3,340억 원), 사회과학(3,300억 원) 등에 비해 절대적인 수치에서 크게 뒤쳐져 있다. 하지만 출판 부수 및 신간종수 조사에 의하면, 2000년 이전 400종대로 출판되었던 순수과학 분야는 2009년 542종으로 증가하여 그 해 전년 대비 가장 많은 증가율을 보였다. 또한 인터넷 서점 Y사에서도 과학 교양도서 신간출간종수가 2007년 652종에서 2010년에는 800여 종으로 증가되는 등 차후 과학 분야 도서 출판시장의 긍정적인 성장이 기대되고 있다.

 과학 도서가 진정으로 대중적으로 사랑받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이른바 ‘스테디셀러’가 필요하다. 전 세계적으로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그러했다. 이런 스테디셀러를 계기로 사람들은 과학과 과학 도서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과학 기술을 이끌어갈 포스테키안이 과학 도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문화기획에서는 과학자로서의 저술 활동이 갖는 의의를 살펴보고 과학 도서가 어떻게 기획되고 출간이 되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강명훈 기자 kmh91@postech.ac.kr


과학자의 저술 활동

과학자의 글쓰기는 사회적 요구

이덕환 교수
서강대 화학 /
과학커뮤니케이션

 과학자들이 전문 학술지나 전공 서적이 아닌 매체에 기고하는 일을 철저하게 외면했던 시절이 있었다. 대부분의 주류 과학자들은 그런 일을 연구와 교육을 포기한 과학자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는 불순한 외도(外道)로 여겼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오로지 과학 연구와 유능한 과학자 양성을 위한 일에 전념해야만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우리 과학자들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리처드 파인만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의 과학자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과 같은 과학 분야의 교양 잡지가 있었고, ‘뉴욕타임스’와 같은 일간지에도 별도의 ‘과학면’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그런 잡지나 신문에 기꺼이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과학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철학서에 가까운 수상록이나 자서전을 남긴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인을 위한 과학자의 글쓰기는 극히 최근에 시작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과학자들도 일반인을 위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과학자들이 직접 나서서 과학의 확산과 정착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광우병과 같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과학자의 글쓰기가 더욱 강조된다. 그런 주장에는 과학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에 과학자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 과학자에 대한 요구가 거셌던 ‘광우병 사태’와 ‘천안함 사태’

 과학자의 글쓰기에 대한 요구는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다. 민주화된 과학기술 시대의 원만한 사회적 합의를 위해 광범위한 분야의 과학적 상식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현대 과학의 발전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과학자의 글쓰기를 더욱 절실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학교에서의 과학 교육만으로는 현대 과학의 실체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자들이 일반인을 위한 글쓰기를 애써 외면할 이유는 없다. 일반인을 위한 글쓰기가 과학에 대해 엄청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회에 대한 과학자의 보답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모든 과학자가 글쓰기에 매달릴 이유는 없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과학자 본연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는 절대 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원하는 과학자의 글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백과사전이나 교과서 방식의 일방적인 설명이나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있는 자료를 확실하게 넘어서는 내용이 반드시 필요하다. 과학자의 제한된 시각에서 일방적으로 과학의 중요성이나 유용성을 강조하는 글도 의미가 없다. 더욱이 일반인을 위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사회 문제에 대한 복합적인 시각도 필요하다. 특히 과학과 관련된 사회 문제를 다루는 경우가 그렇다. 사회 문제의 복합적 특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과학적 측면만을 강조한 글은 ‘과학만능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과학을 단순한 오락거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과학이 ‘쉽고 재미있다’는 주장은 사실일 수도 없고, 실제로 대단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연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생존 가능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가장 심각한 노력의 결과가 바로 현대의 과학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줘야 한다. 무엇보다도 과학자들이 과학 탐구에서 몸에 익힌 철저한 논리성과 합리성, 그리고 비판성을 통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과학자에게 글쓰기를 요구하기 보다는 과학과 사회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전문 과학저술가를 양성하는 것이 더 현명하고 효율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     


과학 도서 기획 과정

과학 도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 Amazon.com 과 TED.com

 도서출판 승산에서는 대중서를 표방하는 ‘말랑말랑’한 과학도서보다는 학계에서 인정하는 묵직한 정통 과학도서를 집중적으로 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도서출판 승산의 기획에는 크게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이공계 학생들이나 과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소개되어야 할 중요한 개념을 잡고, 이에 대한 책들을 찾아 시리즈로 기획하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승산의 대칭 시리즈와 파인만 시리즈이다. 대칭 시리즈의 경우, 국내 독자들에게 대칭을 소개하기 위해 대칭을 다루고 있는 총 5권의 책을 찾아내 시리즈로 기획하여 출간 중이다. 대칭(Symmetry)은 이 개념 하나에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초끈 이론, 현대 우주론의 핵심이 담겨 있을 만큼 중요한 개념으로 21세기 현대과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어이다. 대칭 시리즈 기획은 교원대 신현용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두 번째 방법은 아마존과 같은 해외 사이트나 에이전시, 지인 등을 통해 수집한 수많은 책들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옥석을 가리는 일이다. 승산의 경우, 초기(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는 아마존을 많이 활용하고 덕도 많이 봤다. 출판사를 열기 전부터 매일 5~6시간 동안 아마존 사이트를 통해 최근 과학도서들의 동향과 독자들의 반응 등을 살펴보며 앞으로의 승산 책들을 기획하곤 했다. 아마존 검색을 통해 발견한 대표적인 책이 <엘러건트 유니버스>다.

 과학도서를 다루는 출판사가 많아지면서 이 업계 역시 정보의 스피드가 핵심 경쟁력 중 하나이다. 좋은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찾아 다녀야 한다. 몇 년 전부터 자주 들어가는 TED.com 역시 좋은 정보 제공처 중 하나이다. 최근 승산에서 출판한 <엘리먼트>라는 책은 역대 TED 강연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강연자 켄 로빈슨의 저서이다. 

 승산의 경우, 기획 단계에서 주변 지인들을 통한 정보 수집도 큰 몫을 한다. 내 주변에는 이공계 출신의 지인들이 많은 편인데 나는 언제나 이들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한다. 기획 단계에서 책 내용의 검토를 요청하기도 하고, 좋은 책이 있다면 언제든지 내게 추천해 달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번역 단계의 원고를 보내주고 수차례의 감수를 강요(?)하기도 한다. 내 극성에 못 이긴 지인들은 하나씩 숨겨놨던 자신들의 고급 정보를 제공한다. 지인의 도움으로 출판하게 된 대표적인 책들이 바로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와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이다.

 승산에서 출판할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하다. 그 기준은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을 위해 21세기 양자 기술(양자 컴퓨터, 양자 통신 같은 양자 정보 과학 분야, 양자 철학 등) 시대를 대비한 수학 및 양자 물리학 양서를 출간하는 것이다. 19세기 산업은 전기 기술시대, 20세기는 전자 기술(반도체)시대, 21세기는 양자 기술 시대다. 미래의 진정한 컴퓨터 혁명은 기억 용량이 큰 양자 컴퓨터 발명이다. 지금도 20~30비트 이내의 양자 컴퓨터는 발명되었고 유럽에서는 양자 암호를 상용화할 벤처 회사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젊은 과학자들도 활동이 왕성하다. 과학 도서를 통해 젊은 세대들이 앞으로의 미래 시대를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황승기 대표 / 도서출판 승산


과학 도서 기획 뒷이야기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SIX EASY PIECES)

 출판사 창업을 준비하던 당시 미국 유학 중이던 아들이 겨울 방학을 맞아 귀국하면서 포켓북 원서 3권-SIX EASY PIECES, SIX NOT SO EASY PIECES, QED-을 선물로 가져왔다. 모두 리처드 파인만의 저서였다. 그 중 한 권인 SIX EASY PIECES(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는 전설적인 빨간 책이라고 불리는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Ⅰ,Ⅱ,Ⅲ에서 가장 쉬운 6개장을 뽑아 책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책은 미국 최대 출판사 랜덤하우스가 선정한 20세기에 출간된 100대 논픽션에 선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학 물리책인데도 아마존 판매 순위와 독자 서평이 매우 좋았다. 만약에 승산이 이 책을 첫 번째 책으로 출판할 수만 있다면 첫 번째 책부터 홈런인 것은 확실했다.

 가슴 설레고 흥분된 마음으로 에이전시를 방문해 저작권 계약여부를 물었더니 계약이 가능한 상태라고 했다. 이 책이 미국에서 출간된 지 3년이나 지났는데도 저작권이 살아있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 당시 나는 아직 출판 등록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사무실을 준비하고 출판 등록을 하는데 거의 3개월이 걸렸다. 서둘러 출판 등록을 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에이전시를 다시 찾아갔더니 이번에는 담당자가 이 책의 저작권에 대한 우선권이 메이저급 M 출판사에 있다는 것이다. 천당에서 한 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마음을 비운 내게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렸다. M출판사에서 이 책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승산이 저작권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 출판사 측에서 계약하기 전에 승산이 그 동안 출간한 책 목록을 검토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통보해왔다. 산 너머 산이었다. 이제 막 출판 등록을 한 승산에게 출간한 책 목록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고 설득을 시작했다. 비록 신생 출판사지만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를 훌륭하게 번역, 편집할 능력이 있으며, 파인만의 계약 안 된 모든 책들을 계약하고 싶다고. 미국 출판사의 대답은 의외였다. YES도 NO도 아닌 앞으로 승산이 출간하는 책들을 지켜보고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미국 출판사에 승산이 출간하는 책들을 보내며 이 책의 저작권 계약을 위해 노력했다. 드디어 미국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이 책의 1장을 번역해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번역 내용이 통과되면 계약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처음 계약을 시도한지 3년이 지난 후였다. 외국 출판사의 책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에 감탄하면서도 내게는 가슴 졸인 시간들이었다. 번역 내용이 통과되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데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주요 신문들이 일제히 A급 서평(한 면 전체에 서평을 실어주는 것)을 통해 책을 소개하는 등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물론이고, <파인만의 또 다른 물리 이야기>, <일반인을 위한 파인만의 QED 강의>도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 잘 팔리고 있다.


엘러건트 유니버스

 <슈퍼스트링>, <초공간>을 읽고 초끈 이론에 눈을 떴는데, 아마존 검색을 통해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발견했다. 책 내용, 판매 순위, 독자 서평 모두 놀라움과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이 책은 이미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욱 더 놀라웠던 건 국내에서는 아직 판권이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아마존 검색 정도는 필수가 되어버린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90년대 후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이 책을 계약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책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 에이전시를 수소문한 끝에 미국에 있는 브록만 에이전시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브록만 에이전시는 본인들이 과학책도 기획하고 책도 집필하며 1급 과학자들과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면서 세계적인 과학자들의 저서 저작권을 상당량 가지고 있는 에이전시이다. 책에 대한 정보도 메이저급 출판사에만 제공하고 그들끼리 경쟁을 붙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한 권의 책도 출판하지 않은 신생 출판사인 승산에게 브록만 에이전시가 저작권 계약을 해줄리 만무한 일이었다. 나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고 국내 대형 에이전시를 찾아가 대표한테 이 계약이 성사되도록 부탁했다. 하지만 국내 대형 에이전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브록만 에이전시의 대답은 NO였다. 나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책의 저작권을 획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고민 끝에 내 주변에서 영어와 과학에 매우 능통한 세 사람을 섭외했다. 한 사람은 동시통역으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서울 공대 교수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미국 예일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있는 아들이었다. 이들은 차례로 브록만 담당자에게 전화와 이메일 등 연락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승산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가장 잘 번역, 편집할 수 있는 출판사라는 사실을 전달, 설득하기 시작했다. 한 달이 넘는 설득에 지친 것일까. 담당자는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책을 한 권도 출판하지 않은 신생 출판사로서 기적적으로 <엘러건트 유니버스> 저작권 계약에 성공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막무가내 식이기도 했지만 당시 나에게는 못할 일이 없었다. 이 책을 꼭 내고야 말겠다는 열정과 사명감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계기로 브록만 에이전시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이로 발전해 이후에도 승산에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