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오름돌] ‘아테네 학당’은 어디에
[78오름돌] ‘아테네 학당’은 어디에
  • 강명훈 기자
  • 승인 2010.11.17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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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중ㆍ고등학교 시절을 거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내신’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의 친구가 입시의 적이 되는 학창 시절. 대학에 들어가면 이런 안타까운 경쟁은 끝날 거라 믿으며 친구라는 친밀한 적을 두고 6년을 치열한 경쟁 속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대학 진학이 결정된 후 싸움은 끝났다고 기뻐하며 대학의 낭만을 꿈꿨을 지도 모른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고등학교와는 달리 대학에서는 모든 과목이 절대평가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입학 후 어느 정도 대학이라는 시스템에 익숙해진 지금 ‘대학’에 있는 것인지 ‘고등학교의 연장선’에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성인이 되어 술을 마실 수 있고, 자유롭게 시간표를 짤 수 있는 등 선택할 자유를 얻었지만 어디까지나 느슨해졌을 뿐, 여전히 ‘성적’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있지는 못한 모양이다. 오히려 전국의 인재들이 모인 우리대학에서 경쟁 심리는 더욱 심해졌을지도 모른다. 장학금과 차후 자신의 진로를 위해 ‘학점’이라는 한정된 좌석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여전히 고등학교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커트라인 3.3의 장학금이나, 학점제, 학우들과의 경쟁을 비판하기보다는 어째서 대학에서 ‘학점’이 고등학교 내신 성적처럼 한정된 좌석이어야 하는지를 묻고 싶다.

 우리대학에서 찾기 드문 광경 중의 하나가 토론이다. 몇몇 조를 이루어 과제를 수행해야하는 과목을 제외하고는 서로 자신의 공부에 바쁘다. 모르면 교수, 조교, 멘토, 주위에 잘 아는 친구에게 물어보면 된다. 일방향의 지식 전달은 있지만 쌍방향의 교류는 없다. 2인 이상의 모임은 자주 보이나 그 안에서 과연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같은 대학으로서의 부정적인 면모는 토론의 필요성을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상대평가의 환경에서 비롯된다. 우리대학의 거의 모든 평가는 지필 시험으로 이뤄진다. 고등학교 시험과 크게 다를 것도 없고 혼자 공부하기란 이미 고등학교를 거치며 우리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겐 이미 검증된 공부법이다. 결국 주위 학우들은 경쟁 대상이 되어 버린다. 학생들을 평가할 수단이 지필고사밖에 없다는 것도 문제고, 지필고사를 고집하게 하는 상대평가도 문제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학구열에 불탔던 시절이 있다면 대입을 준비하던 학년 말이었다. 당시에는 내신은 사실상 끝났고 친구들끼리 저마다 스터디 그룹을 짜서 공부하는 게 보통이었다. 특목고여서인지 수업에서도 발표 및 토론 수업이 주였기 때문에 친구들과 공부하는 시간이 이전보다 대폭 늘어난 느낌이었다. 효과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본지 298호 ‘지곡골 목소리’ 코너에 실린 그룹스터디의 효율에 대한 기고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룹스터디는 구성원들의 태도에 따라서는 가장 큰 효율을 발휘할 수 있는 공부방식이다. 대학생의 공부 방식의 표본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상대평가하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는 것 외에 다른 방식을 찾을 여유가 있을까? 졸업 후에 사회는 혼자가 아니라 다수가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곳이다. 사회에 진출하기 바로 전 대학에서 다수에 익숙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것, 이 또한 의무가 아닐까 싶다.

 ‘친구는 친구인 동시에 적이다’라는 말이 통용되는 게 상대평가다. 어째서 선의의 경쟁자이어야 할 친구가 성적에 의해 나눠지는 학점이라는 자리를 두고 다퉈야할 적이 되어버린 걸까.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보며 언젠가는 우리대학에서도 이런 모습을 캠퍼스 어디서나 볼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