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기자단 중국항일유적 탐방
대학생 기자단 중국항일유적 탐방
  • 안준형 기자
  • 승인 2006.09.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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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 불고 있는
동북공정의 여파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인 백두산. 백두산은 전형적인 고산기후를 나타낸다. 연중 겨울 날씨가 230일이나 되고, 강풍일수는 270일이다. 1월의 평균 기온은 -23℃이고, 최저로 내려갔을 땐 -47℃를 기록했다. 남쪽의 더운 공기와 몽골 지방의 찬 공기가 마주치면서 안개도 자주 끼는데, 특히 7~8월에는 33일 정도 안개가 낀다고 하니 여름에 백두산에 가서 구경 제대로 하고 올 확률은 반반이다.

탐방단은 8월 15일 광복절에 백두산 탐방에 나섰다. 백두산에 안개가 끼면 천지를 못 볼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말에 내심 걱정이었는데, 다행히도 탐방단이 백두산에 도착하니 좀 전까지만 해도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백두산 명물 중 하나인 장백폭포를 관람한 후 그 옆으로 난 능선을 따라 1시간 쯤 올라갔을까, 탐방단은 사진으로만 봐 왔던 백두산 천지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마치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진 천지를 본 기자들은 모두들 탄성을 내질렀다. 세계 어느 나라의 경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에 탐방단원들은 내심 흐뭇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백두산에 있으면서 기분이 유쾌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천지 바로 옆에서 음식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런 이유 때문인지 천지의 가장자리는 하수구에 고인 물을 연상케 할 만큼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배경아(영남대) 기자는 “천지가 오염된 모습을 보니 사람의 손길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라며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오염이 심해지고 있는 백두산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뿐만 아니라 탐방단이 ‘대학생 기자단 중국항일유적탐방’이라고 적혀있는 현수막을 펼치고 기념 촬영을 하려고 하자 제복을 입은 중국인들이 와서 제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 측 가이드가 현수막에 적힌 글자의 뜻을 설명해 주었지만, 단순히 한글이 적힌 현수막과 백두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 자체를 불허했다. 말로만 듣던 중국의 동북공정 여파가 여기까지 미치고 있구나 생각하니 화가 나기도 하면서, 우리도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지에서 내려오는 길. 이제 곧 있으면 아름다운 백두산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탐방단 기자들은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통일이 된 후, 우리나라 땅을 통해 다시 한 번 백두산에 오를 것을 다짐하며 탐방단은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 안중근 의사의 얼이 서려있는 하얼빈 역

1909년 10월 26일, 대한제국 침략의 선봉에 섰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 역에 온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안중근 의사는 미리 일본군으로 가장하고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러시아 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안중근 의사의 이러한 의거는 개인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의병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작전지역 내에 들어온 적장을 사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한국 침략을 획책하는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고 규탄함으로써 민족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한국인의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한 세기가 지난 지금, 그 역사적 장소인 하얼빈 역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기차역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하얼빈 역의 플랫폼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위치와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위치가 타일 위에 표시되어 있었다. 불과 10m도 안 되는 짧은 거리에서 저격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안중근 의사가 이토의 사살을 위해 얼마나 치밀한 준비를 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하얼빈 역을 둘러본 뒤 노혜성(전북대) 기자는 “이렇게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한 뒤 총을 쏜 것으로 보아 안중근 의사가 얼마나 대범했는지 알 것 같다.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니 비장감이 느껴진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 731부대

일본은 중국 대륙 침략을 계획하면서 최소한의 물자와 병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야만 중국 대륙의 완전 점령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일본이 생각해낸 전략은 바로 세균전이다. 각종 바이러스 폭탄을 제조하여 순식간에 수만 명을 사살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 세균 연구 속도를 가속화하는데 몰두한 총 책임자 이시이 시로(石井四郞)는 산 사람으로 세균 실험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일본군은 각종 세균을 피실험자 인체에 주입한 후 몸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관찰하기 위해 생체 해부까지 감행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얼린 후 어떤 상태에서 가장 잘 해동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냉수를 붓거나, 온수에 담그거나, 심지어는 끓는 물속에 사람을 집어넣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처절하게 살해된 피실험자의 대부분은 중국인, 러시아인, 그리고 한국인이었다. 여기서 일본의 각종 인체 실험에 사용된 피실험자들은 통나무에 묶인 채 통나무와 별반 다르지 않게 취급되었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마루타(일본어로 ‘통나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 하얼빈에 있는 731부대 유적지에 가면 과거에 일본군이 저질렀던 만행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에 사용했던 여러 가지 기구들을 비롯하여 마루타 실험을 재연한 전시물도 있어서 얼마나 비참하게 피실험자의 인권이 유린되었는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김현지(동의대) 기자는 “일제의 만행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그 악랄함에 할 말을 잃었다.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라며 731부대를 둘러본 소감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