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기자단 중국항일유적 답사
대학생 기자단 중국항일유적 답사
  • 안준형 기자
  • 승인 2006.09.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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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발자취 따라 중국대륙 횡단
독립투사들의 숨결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
▲ 매헌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 홍커우 공원 내에 세워진 매정.<사진제공 : 연세춘추 유재동 기자>



독립운동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자 - 상해 임시정부


1910년 국권 침탈 후, 국내외에서는 일제에 대항하여 국권을 되찾아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특히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난 후 독립 운동가들은 일제에 대한 독립 투쟁을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국내의 한성정부, 중국의 상하이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등 모두 7개의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당시의 열악한 통신 기술로는 지역 간의 원활한 정보 교환이 어려웠고, 결국 민족지도자들은 국내외의 여러 임시정부를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수립된 이후 10여 년간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나 그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제의 감시와 수색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문제까지 겹치면서 임시정부는 여러 번 청사를 옮겨야 했다.

기자단은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는 동안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푸칭리(普慶里) 4호 청사를 찾아갔다. 비록 건물의 외관이 역사 교과서에서 봐왔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지만,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사료를 보니 이곳이 독립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탐방단으로 참가한 김현지(동의대) 기자는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를 직접 본 후 “건물이 생각했던 것보다 협소해 약간 실망했지만, 한편으론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항일투쟁을 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 해진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윤봉길 의사의 뜨거운 민족애

상해 임시정부는 1932년 5월 초 항저우(杭州)로 옮겨가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원인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虹口) 공원 폭탄 투척 사건이었다. 당시 윤봉길 의사는 일본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경축식에 참석한 일본 요인들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의 사라카와 대장 등을 사살하는 쾌거를 올렸다. 김구의 백범일지를 보면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군의 압박이 한층 심해져 비록 임시정부는 더 이상 상하이에 있을 수 없게 되었지만, 국내외에서 납세와 후원이 급격히 증가하여 임시정부 활동에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고, 조선인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가 호의적으로 변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도 컸다고 한다.

현재 홍커우(虹口) 공원은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을 기리는 루쉰 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공원 한 켠에는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와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홍커우 공원을 직접 방문한 기자단은 타국의 공원에 우리나라 사람을 기념하는 비석과 정자가 있다는 사실에 모두들 인상적이라는 반응이었다.

매헌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는 정자인 매정(梅亭)에는 홍커우 공원 의거와 관련한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윤봉길 의사가 생전에 남긴 민족애에 대한 한 글귀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사람은 왜 사느냐 /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산다 / 보라! /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 더 한층 강의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이 글귀를 읽고 난 뒤 박소정(국민대) 기자는 “소름이 끼쳤다. 평소에는 윤봉길 의사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윤봉길이라는 인간 자체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과연 요즘에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중국 내 마지막 임시정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상해에서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으로 이동을 거듭한 임시정부는 1940년에 중경에 자리를 잡게 된다. 당시 임시정부의 수뇌부들은 일본에 대한 군사적 대항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만들어 항일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한국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 인도 전선 등에 파견했고, 1945년에는 국내 정진군을 편성하여 국내로 진입하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 만약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우리나라가 전후 처리과정에서 승전국의 일원으로 인식되어 국제 사회에서 독립국의 지위를 가질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이러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현재 중경에는 임시정부 오사야항(吳師爺港) 청사, 연화지(蓮花池) 청사,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터 등이 남아있어 이러한 역사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았다. 김구가 백범일지 하권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임시정부 오사야항 청사는 현재 건물의 형체는 전혀 남아있지 않고, 예전에 이곳이 임시정부 청사였음을 알리는 비석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한국광복군의 국내 진입 작전을 계획했던 총사령부 역시 현재는 식당으로 바뀌어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김경은(금강대) 기자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유적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방치되고 있어 안타깝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차원의 노력이 필요할 텐데 너무 무관심한 것 같다”라며 해외 유적지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지적했다.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연화지 청사는 그나마 복원이 잘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 역시도 현재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아 유지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했다. 기자단과 동행한 여행사 관계자는 “중국을 방문하는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충칭을 찾지만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는 관광객은 거의 없다. 현재 이 건물은 중국에서 유지 관리를 하기 때문에 찾는 관광객이 없으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라며 한국 관광객들의 관심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갔던 이틀은 많은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었다. 먼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유적들이 중국인들의 무관심 속에 함부로 방치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고, 많은 한국인들 역시 우리의 역사에 무관심하다는 데 다시 한 번 안타까움을 느꼈다. 민족과 국가보다는 개인의 가치가 더욱 중시되는 요즘, 우리 모두 민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우리의 역사를 한 번쯤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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