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편지- 문학의 의미] 정체성 찾기의 여러 길
[문학 편지- 문학의 의미] 정체성 찾기의 여러 길
  • 박상준 / 인문 교수
  • 승인 1970.0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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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트도 아닌, 팬덤도 아닌]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화와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 삽화
< 다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
P군에게.

문학에 대한 몇 가지 상념을 전하는 일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네.

문학의 정체를 잘라 말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자세는 무엇인가에서부터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네. 한 가지 문학관을 고집하는 것보다는 문학의 다양한 얼굴에 골고루 시선을 던지는 것이 현명하리라 했지. 다소 막연한 이러한 전제에서 우리는 인간과 사회, 역사에 대한 문학의 시선을 살펴보았네. 그러면서 ‘운동으로서의 문학’과 ‘작품으로서의 문학’이 보인 다채로운 면모를 시공간적으로 간략히 훑어보았네. 그 결과로 우리는, 인간의 자유로운 면모를 확장하고 사회의 잊혀진 것들을 복권시키며 역사를 재구성하거나 보편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문학의 갈래들을 정리해볼 수 있었네. 끝으로 우리는 휘황찬란한 대중문화의 한 영역인 대중문학 곧 ‘유흥으로서의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시대 문화활동의 특징에 대해서도 짚어보았네. ‘따라하기’와 ‘과시하기’가 그것이었지.

P군, 이 시점에서 나는 진부한 질문 한 가지를 다시 떠올리네.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그것이네.

자네를 포함한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깔려 있는 것이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실체 규정적인 질문이네. 사실 보통 사람들도 의식하지만 않을 뿐, 언제나 이 물음을 바탕에 두고 문학을 접하게 마련이네. 귀여니의 소설을 두고 벌어졌던 네티즌들간의 공방이나 팬덤(fandom)이라 불리는 장르문학 애호가들의 행동은 극단적인 예일 뿐이지. 서점의 문학 코너에서 책을 골라 지갑을 열 때마다 우리들 각자는 이 질문에 답하고 있는 셈이니 말일세.

사정이 이러하니,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음미하는 것으로 우리 이야기의 끝을 시작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싶네. 지금까지의 문학 이야기를 살려줄 바가 여기에 있는 까닭이네.

< 미래에 대한 규정 >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네. 실체를 묻는 인문학의 질문들이 대체로 그러한 것처럼 하나의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는 않은 까닭이지. 따라서 필요한 일은, 답들 중의 하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답이 여럿일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지는 일’의 의미를 따져보는 것일세.

사실 이 질문은 문학의 정체를 묻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네. 이 질문에 답하는 수많은 논의들을 일별해보면 사정이 분명해지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경우에 따라서 ‘문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되어 왔는가?’ 혹은 ‘문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등을 의미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문학은 어떠한 것인가’를 거쳐서 ‘문학의 기능은 무엇인가’ 등으로 사실상 치환되곤 했네. 이렇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실체 규정적 질문은 실체의 규정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담론 속에서 제기되어 왔던 것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 형식이 유지되는 것은, 위의 다양한 질문들을 포괄하면서 문학의 실체를 규정하려는 지향성을 내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렇게 이 질문의 성격을 명확히 해 두고 보면 이 질문을 던지는 일의 의미 또한 자명해지네. 결론을 당겨와 말하자면, 요컨대 이 질문은 반성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네. 현재의 문학을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문학을 뒤돌아 살펴봄으로써 문학의 미래 모습을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란 말일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유추적으로 생각해보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어떤 상황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가를 생각해보면 답이 조금 분명해지네. 이 질문은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루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어 자신의 미래상을 모색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네. 그렇지 않은가.

같은 의미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또한 ‘탐구’가 아니라 ‘형성’에 관련된다고 할 수 있네. 현재 우리 주위의 문학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학이 장차 어떠해야 하겠는가라는 소망과 바람을 담은 질문이라는 말일세.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문학의 과거와 현재가 아니라 그 미래에 관련되어 있네. 달리 말하자면 이 질문은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규정’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네.

따라서 이 질문을 우리가 공유할 때, 우리의 문학활동 곧 문학작품에 대한 향유의 방식과 의미가 달라질 것이네. 나아가서, 그것을 일부분으로 하는 우리의 문화생활 전반의 양상 또한 달라지겠지. P군, 어떤가, 너무 거창한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우리가 무엇을 묻는가 그 물음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가에 따라 얻는 것이 달라지기 마련 아니던가. 이 질문이 지금까지의 우리들 문학 이야기를 살려주리라는 뜻이 여기에 있네.

< 엘리트주의와 팬덤을 넘어서 >
P군. 이제 우리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고 함께 묻는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무엇을 요구해야 하겠는가.

일단 소극적으로 이야기해보세. 나로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곧 엘리트주의와 팬덤만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네.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바로, 편협하기 때문일세. 편협함이야말로 반문화적이라고 나는 믿네.

엘리트문학도 필요하고 팬덤을 구성하는 장르문학 또한 소중하지만, 그 각각이 문학의 왕자임을 참칭하는 것은 곤란하네. 그럼으로써 문학의 왕국을 자신의 영역으로 한정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네.

누보로망(nouveau roman)에 뿌리를 두고 모더니즘 지향성의 극단을 달리는 난해한 문학이나 독특한 철학세계에 근거하여 보통사람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문학세계 등과 같은 것만을 애호하여 대중과 소통하지 않는 자세뿐만 아니라, 교과서와 문학사를 장악하고 있는 본격문학만이 진정한(!) 문학이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태도 등이 부정적인 엘리트주의의 실상이 될 것이네. 이러한 문학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마는 그것만을 문학인 양 편애하는 것은 문제라는 말일세.

마찬가지로, 장르문학에만 빠져서 주류문학을 뱀과 구렁이 보듯 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하네. SF팬덤에서 이러한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일도 아니라 할 만큼, 대중문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향 또한 심히 우려할만한 일이네. 교과서 문학과 애호하는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아두고, 예컨대 무협소설만이 소설인 줄 안다면 이는 불행한 일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물론, 넓게 생각하면 문학 감상에서의 엘리트주의도 필요하고 팬덤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문학 수용자 한 명 한 명의 입장에서 보면 사정이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네. 엘리트주의와 팬덤 양자에 두루 친숙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를 꿈꾸느니 우리의 문학활동 양상이 편견을 넘어선 상호소통의 모습을 띠기를 바라는 것이 옳지 않겠나 싶네.

< 원하는 만큼 얻는 유토피아 >
P군, 여기 문학의 왕국이 있네.

끊임없이 경계를 확장해 나아가고, 도로망이 항시 변경되며 건물의 위치와 모양, 위상이 부단히 바뀌는 이곳은 어떠한 지도도 용납하지 않네. 자네가 남기는 자취가 곧 길이며, 자네가 머무는 모든 곳이 집이자 고향이고, 자네 발걸음 닿는 곳까지가 국경이네.

P군 자네는 지금 유토피아를 보고 있네. 한 가지 길과 특정한 모양의 집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자네가 원하는 만큼을 얻게 되는 곳이기 때문이네. 원하는 만큼 얻는 곳, 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문학이라는 유토피아의 왕국 앞에 선 P군이여, 부디 두루두루 돌아다니길 바라네.

무엇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미래를 열어두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넓은 시선이 필요하네. 차이를 인정하면서 개별자들 하나하나를 존중하는 태도야말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 않는가. 바로 이러한 까닭에, 문학의 왕국을 여행하는 군을 위한 안내서에 다음 몇 가지를 적고 싶네.

어슐러 르 귄의 <빼앗긴 자들>에서 사회사상을,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페미니즘을 배우고 이해할 수 있을 걸세. 김주희의 <피터팬 죽이기>나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은희경의 <마이너리그> 등에서 군은 보통사람들의 속내를 울고 웃으며 볼 수 있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군은 사랑의 몇 가지 표정을 읽게 될 것이고,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속에서는 부단한 인간사로서 역사를 보게 될 것이네. 이들 각 동네에서 군의 발걸음을 넓히게.

군을 위한 안내서에 적힌 이들 주소들의 열린 총합이야말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포함된 모든 질문들에 해답을 주는 것일세. 정체성 찾기란, 원래, 여러 길을 밟는 편력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부디, 얻고자 하는 만큼 원하기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