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편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문학편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 박상준/인문 교수
  • 승인 1970.0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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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 속의 문학, 그 세 가지 얼굴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문학의 존재 방식은 큰 변화를 겪었다. 후원자(patron)를 잃은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높은 안목을 가지고 예술가를 후원하는 일을 명예롭게 생각하던 귀족들이 몰락하면서, 문학뿐 아니라 예술 전체가 실로 딱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놀이’와 마찬가지로 예술 또한 ‘생산’이 아니라 ‘소비’와 ‘탕진’에 가까운 것이어서, 예술가의 생존과 위신을 보장해주던 후원제의 붕괴와 더불어 문학과 예술의 존속 자체가 문제로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이 취한 태도는 크게 세 가지이다. 신흥 부르주아지와 손을 잡고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적극 나선 경우가 첫째이다.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 시민사회와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의 문학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둘과는 달리, 새롭게 펼쳐진 시민사회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원리 곧 시장 논리에 몸을 맡기는 것이 셋째 유형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 앞의 두 가지가 문학이 현대사회와 맺는 고유한 관계를 보여준다.

운동으로서의 문학, 화해와 반목의 스펙트럼
현대사회와의 관계에 있어 첫 번째 경우에 속하는 갈래를 ‘운동으로서의 문학’이라고 불러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좀더 낫게 바꾸고자 하는 모든 행동을 사회운동이라 할 때, 부르주아지들이 품은 사회 변혁의 꿈을 나눠 가진 문학가들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선 까닭이다.
이러한 문학가들은 역사의 전개에 따라서 시민계층과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근대 지식인의 등장과 변화 양상을 설명하는 사르트르의 말대로(<지식인을 위한 변명>) 이들 또한 유사한 과정을 겪는다. 등장 초기에는 부르주아지들의 이념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부르주아 계급 내에서 근대자본주의사회를 비판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을 때 일군의 문학가들 또한 이에 가담한다. 그 결과 운동으로서의 문학은, 이데올로기상으로 볼 때 좌ㆍ우 문학 활동을 양극으로 하여, 여러 갈래로 폭넓게 펼쳐지게 된다.
우리나라 근ㆍ현대문학의 경우, 이광수와 염상섭, 이기영이 이러한 포괄적인 모습과 그 분화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광수(1892~?)는 우리 민족을 바람직한 근대인으로 개조하려는 소망을 담은 작품들을 줄기차게 발표했다. <무정>(1917), <개척자>(1918), <흙>(1933) 등과 같은 계몽주의 소설이 그 성과이다. 이들 작품을 통해서 그는 자신을 수양하며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이상적인 인간을 바람직한 근대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스스로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톨스토이의 문학세계 또한 동일한 갈래로 살펴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염상섭(1897~1963)은 자기 시대의 전체적인 모습을 객관적으로 그리는 데 주력한 작가이다. 그의 소설은 인간과 사회를 긴장 관계 속에서 형상화하고 있다. 사람살이의 근본적인 힘을 ‘돈’과 ‘성욕’이라 보고 그에 따르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모습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그는 사회의 전체적인 면모를 작품에 담아낸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바로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주요 작품에 해당하는 <사랑과 죄>(1928), <삼대>(1931) 등이다.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담아내는 이러한 특징으로 해서, 염상섭의 문학 활동은 흔히 발자크(1799~1850)나 졸라(1840~1902)의 경우와 비교되어 왔다. 이들 또한 19세기 유럽 사회의 총체적인 면모를 작품화하는 데 평생을 바친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약 20년에 걸쳐서 쓴 70여 편의 소설을 통해 19세기 전반기의 프랑스 사회를 탐사한 발자크의 <인간 희극>이나, 유사한 의미를 갖는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1871~1893)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중도적인 입장에서 사회의 전체적인 면모를 작품화하려는 이들과는 달리,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 개혁에 나서려 했던 경우가 좌파 문인들의 문학 활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30년대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활동이 그러한 경우인데, 이기영(1896~1984)이 주요한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고향>(1934)은 당시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였던 지주-소작농 갈등을 전면적으로 다루면서 좌파 계급투쟁의 사회관을 작품에 담고 있다. 같은 계열로 소련과 중국의 혁명문학을 들 수 있다.

‘작품’으로서의 문학, 현대사회의 역설적인 거울
운동으로서의 문학 반대편에 ‘작품’으로서의 문학이 있어 근현대 사회와 내밀하지만 본질적인 긴장 관계를 이룬다. 예술지상주의를 극단으로 하는 이 흐름은, 자본주의 사회의 반예술적인 성격에 자신의 존재를 걸고 맞서왔다.
노동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던 원시종합예술(ballad dance) 이후로, 각 시대에 인정받던 문학과 예술은 대체로 삶의 현장에 직접 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항상 현실 너머를 동경하며 정체를 규정할 수 없는 자신의 이상을 추구해왔다. 그 결과가 바로 문학 예술 작품에 고유한 광채 곧 아우라(Aura)의 획득이다. 아우라를 갖는 문학예술품은 하나의 ‘작품’으로서 인간이 만드는 다른 모든 산물들과는 달리 유일무이한 생명력을 갖는다.
문제는 이러한 작품의 창조가 현실사회의 논리에서 볼 때는 무용한 일이라는 데서 발생한다. 경제적인 이윤의 창출과는 거리가 먼 이러한 창조 행위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는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후원제의 붕괴와 더불어서 ‘작품’의 창조를 뒷받침해줄 경제 외적인 조건이 없어진 까닭이다.
상황이 이러해서, 자신의 문학성을 계속 추구하고자 하는 문학가는 사회의 이단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논리와는 다른 자신들 고유의 원리를 좇아 움직이는 그들은, 사회의 입장에서 볼 때 무익하고 가치 없는 자들이며 더 나아가서는 삶의 안녕을 해치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들이 창조하는 작품 또한 어떠한 실제적인 의미도 갖지 못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상태를 유지하는 각종 규범이나 금제를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품’으로서의 문학은 바로 그러한 존재 자체로써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어둠이 빛을 밝혀주듯이, 현대사회의 이물질이라 할 이 작품들의 존재가 현대사회의 진정한 면모와 일반적인 원리를 역설적으로 환기시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김동인(1900~1951)을 시작으로 하여, 나도향(1902~1927), 이상(1910~1937) 등의 문학이 이에 해당한다. 문예사조상으로는 차이를 보여도 이들은 모두 현실 건너편에 자신들만의 문학 세계를 꾸렸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예술의 창조에 들어가는 각고의 노력과 희생을 강조한 김동인의 <광염소나타>(1929)나 <광화사>(1935) 등은 예술지상주의의 면모를 보인다. 나도향의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1922)과 <환희>(1923) 등은 현실을 돌보지 않고 특정 정서를 극대화한 감상주의(sentimentalism)의 극한을 보여주고, 이상의 시와 <종생기>(1937), <실화>(1939) 등의 소설은 현실과 어긋났던 자신의 삶 자체가 작품으로 된 경우의 좋은 예가 된다.
자신만의 예술을 찾기 위해 경제적 궁핍과 사회의 몰인정, 냉대를 뒤로하는 이러한 모습은 근대의 문학 예술가들에게 널리 퍼진 현상이기도 하다. 멀리는 모더니즘의 선구로 꼽히는 보들레르(1821~1867)가 대표적인 예이며 그 뒤를 이은 상징주의 시인들 곧 폴 베를렌(1844~1896)이나 로트레아몽(1846~1870), 랭보(1854~1891) 모두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현대사회의 논리 건너편에서 이들은 몇 편의 시를 이슬처럼 남기고 고단한 생을 마감했다. 현재의 우리 주변에서도,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얻을 수 있었을 물질적인 풍요를 뒤로하고, 일반인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문예지에 작품을 쓰는 문인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문학 감상과 미래 꿈꾸기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문학은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다. 사회 이념의 대변자이자 비판자인 운동으로서의 문학은, 현대사회의 참모습을 직접 보여주거나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사회상을 제시해준다.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자신만의 성채를 쌓는 듯이 보이는 작품으로서의 문학 또한, 현대사회의 본질을 새삼 생각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 모든 갈래들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의 모습을 해체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현재의 사회를 낫게 만들고자 하거나 그에 귀속되기를 거부하는 태도 모두 현실이 문제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문학작품을 통해 우리도 현실을 낯설게 보고 좀더 나은 사회를 꿈꿀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문학작품이 그려 보이거나 염원하는 사회의 모습이란 궁극적으로 하나의 상,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문학작품을 전공 교재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 이들 작품이 의미를 갖는 것은, 작품을 통한 작가와의 대화에 힘입어, 익숙한 것들과 결별한 채, 현재 사회를 꿰뚫어보고 미래를 꿈꾸는 방법을 우리가 얻을 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