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편지] 현대사회와 문학 - 천의 얼굴, 문학의 죽음 이후
[문학편지] 현대사회와 문학 - 천의 얼굴, 문학의 죽음 이후
  • 박상준 / 인문 교수
  • 승인 1970.0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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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상과학소설과 SF, 무협지와 무협소설

문학에 대해서 공정하게 이야기하기 힘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길을 안내하는 밤하늘의 달과 별 같은 그러한 문학의 성좌가 흩어진 지 오래된 까닭이다. 전문가들의 문학비평에서부터 인터넷에 널리 퍼져 있는 이런 저런 문학에 관한 이야기들을 보면, 그 각각이 그리고 서로가 한자리에서 논의하기 어려울 만큼 분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사람 수만큼 많은 문학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비평가와 대중들이 소통 불가능한 상황에 빠진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고, 이제는 적지 않은 작가들까지도 저들만의 공간으로 들어가고 있다. 약간 비관적으로 그리고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작품의 생산과 수용, 전달을 아우르는 문학 활동의 주요한 주체들이라 할 작가, 독자, 비평가, 연구자들이 각기 핵분열을 이루면서 상호간에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형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본격문학 문인과 대중문학 문인은 견원지간 상태에 있고, 대중들은 대중들대로 ‘똑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문학 활동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강조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러한 사정이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소중한 문학적 전통으로 꼽고 있는 전근대사회의 평민문학 등이 당시 사회에서는 문학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가까운 예로는, 지금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SF’나 ‘무협소설’ 등이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공상과학소설’이니 ‘무협지’니 하여 문학의 격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규정되어오던 것을 들 수 있다. 위의 예들은, 현재 문학으로 여겨지는 것들 중의 일부를 두고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고 규정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원리상 동일하나 반대의 예도 많다. 국가를 불문하고 서간문이 오랫동안 문학으로 인정되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 기준에서 보면 내용상 철학의 범주로 분류되는 형성기 서구 근대 에세이들의 상당수는 문학적 글쓰기의 주요한 장르로 여겨졌다. 딸이 시집가서 지켜야 할 규범들을 운문 형식에 담아낸 내방가사가 조선시대 문학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것도 여기 보탤 수 있겠다.

이러한 예들은, 수많은 문학들 중에서 어떤 것은 새롭게 자격을 획득한 반면 다른 어떤 것들은 그 자격을 상실하기도 해왔음을 알려준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쉽게 확인되는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문학의 경계가 부단히 변화해왔다는 문학의 역사성이 첫째요, 그러한 변화에서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경계를 가르는 논의 곧 ‘문학성’ 관련 담론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 둘째다. 지금 우리가 문학에 대해 공정하게 이야기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할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후자다.


2 . 톨스토이냐 황희 정승이냐

현재에 이르러 문학에 대한 논의들이 공정성을 잃게 되었다는 점은, ‘문학성’ 관련 담론들의 위상이 심히 위태로워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문학의 역사성이 보여주듯이 문학의 경계가 끊임없이 변화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학성’ 관련 담론들이 권위를 잃게 됨으로써 문학에 대한 현재의 논의들이 편파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문학전문가들과 대중들 사이에 두루 통용되는 공정한 문학관이 없다는 사실’과, 이것의 원인이자 동시에 그 결과이기도 한 바 ‘문학 활동 주체들간의 소통불가능성의 심화와 그에 따른 괴리’, 이 두 가지 현상을 두고 일찍이 ‘문학의 죽음’이 선고되었다. 20세기 전반기까지 생명을 유지해오던 문학 이른바 본격문학 혹은 정통문학은 이제 교과서와 대학 강단에서나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라는 서구의 진단이, 우리나라에서도 멀지 않은 장래에 내려질 것 같다. 엄밀히 따지면 사실 관계는 이미 그러한데 선고만이 남은 형편이라 할만하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눈길이 닿는 한쪽에 톨스토이가 있고 그 반대편에 황희 정승이 있다.

현재의 우리는 여러모로 톨스토이보다 불행하다. 그에게는 자신의 삶을 규율해주는 원리뿐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나가야 할 이상적인 삶의 형태가 밤하늘의 별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불행하다면 불행했던 그의 가정사보다도 더 소중했던 이러한 이상의 결과가 바로 동양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톨스토이주의이다.

문학예술에 대해서도 그러해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신념과 열정을 담아 <예술론>(1898)을 써냈다. 그의 <예술론>은 과격하다 할 만큼 매우 근본적인(radical) 주장을 담고 있다. 자기 시대의 예술을 상류사회의 특권적인 것이라 규정하여 아예 예술이 아니라고 규정한 뒤, 민중들의 삶의 공간, 노동과 땀의 현장에 긴밀히 뿌리내린 것만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주창한 것이다.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민중예술론에 속하는 예술관을 역설하는 그의 모습은 그대로 청년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청년 정신을 잃지 않은 것만도 부러운 일이지만, 정작 우리가 그보다 불행하다고 말하게 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톨스토이는 소수의 귀족에게 등을 돌려 자신의 문학을 주창하면서 일반 민중의 삶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자신의 문학성을 추구하는 일이 민주주의의 일반화라는 근대의 흐름에 조응할 수 있었던 것인데, 바로 이 점이 톨스토이가 부러운 점이고 그에 비해 우리가 불행한 이유이다. 그의 경우 사회 일반 민중의 예술을 전범으로 삼으면서도 문학이고 예술일 수 있었던 반면, 우리는 그렇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상황의 차이가 중요하다. 이 면에 주목할 때 이른바 ‘문학의 죽음’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진단이 가리키는 상황을 제대로 보고 그 의미를 가늠하여 대처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문학의 죽음이란 사실 고전의 운명에 관해서만 적실한 표현이다. 1980년대 중반에도 우리는 ‘소설이 없다’는 암울한 진단을 들은 적이 있고,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소설문학의 여성적인 편향이 우려할만하다는 걱정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기에도 서점에는 소설들이 넘쳐나서 24시간 편의점에까지 제 영역을 확장한 바 있다. 부재가 진단되고 그 양태가 걱정되었던 것은 항상 소위 본격문학이었을 뿐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문학은 대형 유통센터의 상품처럼 넘쳐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러한 문학상품만이 활개를 치고 정통적이고 전통적인 문학의 자리가 위축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인터넷의 활성화를 기반으로 하여 대중들의 문학 활동 또한 소수 본격문학처럼 자기들만의 잔치가 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일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 할 때 일단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바로 황희 정승의 태도이다. 서로 다투던 이 종의 말도 옳고 다른 종의 말도 옳고 둘 모두가 옳다고 하는 잘못을 지적하는 아내의 말도 옳다 하는 그의 태도는, 줏대 없음이라기보다 차이에 대한 존중으로 읽힐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문학성을 따지는 논의들이 서로 토론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 활동의 주체들이 서로 소통하지 않는 상황을 초래한 이 모든 사태의 궁극적인 사회적 원인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먼저 차이를 인정하고 사태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렇게 한 호흡 길게 보면, 이른바 오늘날 문학의 위기란, 탈산업사회로 지칭되는 전반적인 문화혁명의 일부이자, 인쇄문화가 전자문화로 변형되는 기술혁명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전파미디어ㆍ시청각미디어에 의해 전통적인 문학이 위기에 몰린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문자와 종이 책이라는 기존의 존재 형식과 관련되어 있고 그에 근거하고 있던 의미 영역 곧 재래의 ‘문학성’ 또한 위기에 처한 것이다.


3 . 문학, 그 천 가지 얼굴 껴안기

문학성이 위기에 처해 문학의 죽음이 이야기되는 것은, 앞서 살핀 진단에 기초하여 거꾸로 보면, 문학의 얼굴이 좀더 풍요로워졌다는 징표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생산적인 것은 톨스토이의 길이라기보다는 황희 정승의 태도이다. 문학성이라는 창공의 별을 향해 자기 정체성을 수립해온 정통 문학과 시장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문화산업으로서의 대중문학,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전자문화 시대의 문학까지 실로 다양한 문학들이 혼재한 상황에서 길을 잃지 않고 풍요로울 수 있는 방식은 일단 자신을 비우고 각각을 인정하는 황희 정승의 길뿐이다.

채우고 다듬기 위한 첫걸음으로서의 비움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우리는 와 있다. 이렇게 비운 상태에서, 현재의 문학이 보이고 있는 넓은 품, 그 천의 얼굴을 일별해야 한다. 이 자리를 빌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 대중문화 등과 문학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성과와 흔적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거칠게나마 살펴보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뜻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