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선배사랑, 학교사랑, 포스텍 '사랑일기'
[동문기고] 선배사랑, 학교사랑, 포스텍 '사랑일기'
  • 이종해 / 기계공학과 93,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근무
  • 승인 2005.04.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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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십 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란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그 노래 제목처럼 정확히 십 년 전에는 저도 도서관 한켠에서 졸고 떠들면서 책은 보는 둥 마는 둥 앉아 있곤 했습니다. 그 때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십 년 전의 일기라니… 흔한 말로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이 지나면 일기를 보더라도 당시의 감정과 기억들이 제대로 되새겨지기나 할까요. 스물 갓 넘긴 당시의 제게는 십 년 전은 코나 흘리고 있을 나이였으니 십 년 전의 일기는 그림 일기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에 와서 보니 십 년 전의 기억도 또렷하게 되살아납니다. 멍하니 도서관 창 밖으로 내다보곤 했던 볕 좋은 날의 푸르른 잔디밭, 한여름 뙤약볕에 씩씩대며 오르던 78계단이며, 학생회관에서부터 흐르던 시원스런 물줄기. 밤새 연못가에서 왁자하게 놀아대는 학생들 통에 오전 내내 졸아대던 오리들하며 매일 밤 푸짐하게 야식을 먹었는지 뒤뚱대며 걸어다니던 도둑고양이까지. 서른을 넘겼고 이제 학교를 떠난 지도 여러 해지만, 돌아보면 아직도 가까이 있고 손에 잡힐 것 같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십 년 전 일기를 꺼내어 본다는 노랫말에 깊은 공감을 느낍니다.

그렇게 지난 십 년을 돌아보면 제가 건진 가장 큰 수확(?)은 아무래도 제 아내입니다. 갓 스물에 포항공대에 입학해서 처음 만나, 그로부터 12년이나 지나서 바로 얼마 전인 3월20일 춘분에 결국은 결혼하고야 말았으니까요. 20대 시절을 되돌아 볼 때 아내를 떼어놓고는 얘기가 안 됩니다. 떠오르는 제 스무 살부터의 기억들의 한켠에는 어김없이 그녀가 서 있거나 또는 제 옆에서 같이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이쯤 되면 왜 여기서 이렇게 아내타령이나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되지요. 말씀드리자면 저는 캠퍼스 커플, 즉 CC였습니다. 결혼에 이른 CC가 한 둘이 아닐진대 그게 무슨? 그런데, 저희는 약간 문제(?)가 있는 커플이었습니다.

제가 93학번으로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을 때 그녀는 이미 같은 기계공학과 2학년 선배였던 거지요. 굳이 타이틀을 붙여주자면 개교 이래 첫 기계공학과 커플 쯤 됩니다. 그게 이렇게 지면에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구요. 지금에야 연상녀 연하남이 흔하지만, 원체 여자가 드문 포항공대, 거기다가 여자가 드물다 못해 없다시피 했던 기계공학과에서(제 아내가 개교이래 기계과 두 번째 여학생이었으니까요) 그것도 선배를 꼬드겼다는 시선은 참 따갑기 그지없었지요.

물론, 먼저 꼬리친 건 그녀였지만, 저 말고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았기 때문에(이젠 저도 헷갈립니다) 한동안 술자리에 갈 때마다 선배들에게 은근한 협박에 시달렸습니다. 얼마 전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이라며 친구가 올려준 사진에서는 예전에 ‘우리 동기 울리면 가만 안 둔다’며 협박을 하던 그 선배들이 꺼먼 양복을 입고는 하얀 면사포의 신부 뒤에 무슨 조폭처럼 어색하게 웃으면서 늘어서 있더군요.

어찌 보면 아내는 제게는 학교가 준 선물 같기도 합니다. 가끔은 그런 얘길 할 때가 있습니다. 포항공대로 오지 않았더라면 평생 서로 얼굴도 모르고 살았지 않았겠냐고요. 살다보면 누구나 드라마 꺼리 한 가지 씩은 가지고 살겠지만 우리에게는 대학생활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렇게 보면 정말 학교가 준 선물인 거지요. 물론 제가 로맨스만으로 그 시절을 보낸 것만은 아닙니다. 학부와 대학원을 거치는 6년이라는 세월 동안 공학도로서의 저의 꿈과 고뇌, 그리고 성장도 고스란히 학교 안에 담겨 있습니다.

제가 후배들에게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7회, 너희는 8회 입학생이니 우리로 인해 우리학교는 일곱 살이 되었고, 너희로 인해 우리 학교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이 아이가 잘 자라서 건장한 성인이 될 수 있게 한 해 한 해 해를 이어가며 동문들이 잘 해나가자고요. 그런데 벌써 사람의 나이로 쳐서 성인이 다 되었습니다.

제가 있었던 그 자리에 후배가 오고, 또 그 후배가 있던 자리에 또 다음의 후배가 오고…. 그렇게 우리 모교는 사람의 세월로 쳐서 성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또 얼마나 많은 동문들의 이야기들을 품고서 그렇게 자랐을까요. 다가오는 주말엔 주례 서주신 한경섭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도 드릴 겸, 교정 구석구석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찾아보러 한번 가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