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대표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세기 대표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탄생 100주년을 맞아
  • 나기원 기자
  • 승인 2004.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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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합리성·기괴성에도 불구 사람 매혹시킨 천재 화가 살바도르 달리
피카소 만난 후 작품에 큰변화

달리(Salvador Dali)는 스페인 출신의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그는 1904년 스페인 카탈로니아에서 태어났으며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형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달리는 10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14살 때부터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미술학교에 들어갔으나 과격한 성품과 반정부 활동으로 퇴학조치를 당한다.

그는 일찍이 철학을 좋아해 칸트와 니체의 책을 즐겨 읽으며 입체파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베르메르, 벨라스케스, 라파엘로 등 고전화에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는 그가 작품을 모작한 유일한 화가로 남아있다. 또한 이 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탐독하기도 한다.

1927년 파리에 나온 그는 피카소를 만난 후 큰 변화를 보이게 된다. 달리는 이 때 미로 등 초현실주의주의 화가들과 관계를 맺으며 본격적인 활약을 하기 시작한다. 1929년 25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이후 유럽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이 시절 그는 일생의 동반자 갈라를 만났으며 영화 극본, 조각, 삽화에 걸치는 넓은 분야의 작품 활동을 보여주었다.

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고전주의로 복귀하려는 욕구가 커졌으며 원자과학이나 DNA, 카톨릭의 신비성을 추구하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1940년 미국에 귀화했으며 1989년 죽을 때까지 왕성한 작품활동과 많은 회고전을 가졌다.


유부녀 갈라와 ‘불륜행각’

1929년 달리의 집에 마그리드 부처와 함께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 갈라가 찾아왔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파리로 여행을 떠나고 갈라는 이후 그의 동반자이자 뮤즈가 된다. 그들의 결합(사실상의 불륜)은 1929년 파리전시회에서 석판화 위에 친필로 쓴 “나는 가끔씩 어머니 초상화 위에 재미로 침을 뱉는다”는 이야기와 함께 달리의 아버지를 매우 화나게 만들어 달리에게 절연장을 보내게 만들었으며 그와 아버지의 관계는 1948년이 지나서야 겨우 회복되게 된다.

달리의 수많은 작품 속에는 갈라가 등장하며 갈라는 성모마리아의 모습으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화가들 중 달리처럼 여자의 내조와 도움을 받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편집광적 비평적 방법 채택

깨어 있는 동안에도 유효한 꿈을 지속시켜 주는 정신착란을 객관화하고 체계화한다. 달리가 스스로 ‘편집광적 비판적 방법’이라 부른 이런 그의 창작수법은 비이성적인 환각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편집증을 자신의 강박관념과 욕구를 조직하기 위해 그 소유권을 획득하고 체계화하는 방법이라고 말했으며 하나의 대상을 2중 3중으로 다른 이미지로 보는 병적인 착각을 이용했다. 즉 말이 나체로 보인다거나 하나의 풍경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거나 하는 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그림이란 많은 비합리적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천연색 사진”라고 정의했다.

일생동안 ‘꿈의해석’에 집중

초현실주의자들은 프로이드의 심리학에서 밝혀낸 무의식과 본능의 세계를 해방시킴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려고 했다. 꿈과 욕망은 초현실주의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소재였으며, 어떤 의식이나 의도 없이 무의식의 세계를 무의식적 상태로 대할 때 거기서 떠오르는 이미지의 흐름을 그대로 기록하는 방법인 자동기술법이나 편집광적 비평적 방법과 같은 표현방법을 통해 화면에 그것을 노출시키기 위한 과정은 인간의 의식적인 의도와 이성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달리는 1922년에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을 접했으며 26년부터 그의 그림에는 꿈과 무의식의 표현이 나타난다. 달리의 일생 중 가장 집중했던 점은 꿈의 해석이며 1932년에 달리를 직접 만난 프로이드는 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기괴한 그림으로 사람 매혹

달리의 그림은 비합리적이고 기괴한 화면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정통적인 회화기법, 즉 정밀한 소묘나 오차 없는 원근법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이런 그의 그림은 그 아이러니함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또한 그의 그림의 배경으로는 그가 성장한 카다퀘스의 해안과 리가트 항이 자주 등장한다. 달리는 리가트 항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불모의 고장이요, 아침은 난폭하고 거친 명랑함을, 저녁은 기분 나쁜 비애를 가끔 느끼게 하는 곳이다”라고 했지만 그에게 이 곳은 평안함을 주는 곳이었다고 생각된다.

달리가 자신의 그림의 의미에 대해 설명한 예는 그다지 많지 않다. 1935년 출판된 에세이집 ‘비합리성 정복’에서 그는 그의 그림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림을 그릴 때 난 나의 그림들이 이 그림들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그림들의 의미는 심오하다. 복잡하고, 시종일관하고 무의식적이다. 이는 가장 간단한 논리적인 직관의 분석을 빠져나왔다. 내 그림을 일상의 언어로 묘사하기 위해, 설명하기 위해선 특별한 분석법에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히틀러를 추종하고 돈을 밝혀 ‘달러화에 굶주린 화가’라고 불리기도 했던 달리지만 그는 아직도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의 대가로, 세계적인 스타로,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에서 나아가 대중문화 전반에서 오늘날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천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