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동산]학문적 활동과 유용성 잣대
[노벨동산]학문적 활동과 유용성 잣대
  • 박형주 / 수학과 주임교수
  • 승인 1970.0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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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성이 수학의 유용성 막을 이유 없어...학문에 함부로 유용성 잣대를 대지 말자

20세기 중반 이전에는 수학이 소수의 엘리트 또는 전문가들의 지적 관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대중문화 발전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있는 수학을 보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출발은 2차 세계대전 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큰 전쟁을 치르고 냉전시대가 이어지면서, 폰 노이만(J. von Neumann)이나 앨런 튜링(A. Turing)같은 수학자들이 과학기술의 진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탓이다.

현대수학이 정보화시대의 도래에 기여한 예를 들어보자. 불행하게도 우리가 사는 세계는 완벽하지 않아서 많은 실수가 발생한다. 제 3자를 매개로 삼은 두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에서도 흔히 왜곡이 생겨 진의가 전달되지 않곤 한다. 연인 간에도 서로의 문화적 배경의 차이 등으로 뜻이 다르게 전달되는 일도 있다. “아니오”라는 메시지가 온 경우에도 여러 정황을 고려하여 “예”인지, “아니오”인지를 추측하는 체계적인 이론이 있다면 편하지 않을까? 정보의 교류도 예외가 아니다. 정보의 교류 중 발생하는 왜곡(error)을 탐지 또는 교정하는 이론이 코딩이론(coding theory)이라고 하는 수학 이론이다. 1948년에 현대정보이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이 쓴 유명한 논문인 ‘통신의 수학적 이론’에서 출발하였다. 이 논문에서 섀넌은 이제는 일상어가 되어 버린 비트(bit) 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통신과정에서의 왜곡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추상적이라 하여 코딩 이론의 실용성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1971년에 무인탐사우주선인 머리너(Mariner) 9호가 화성의 궤도에 진입하여 사진을 지구로 송신했는데, 당시로는 경이로운 일이었다. 태양활동의 영향과 지구대기의 난 조건으로 화상신호에 회복불능으로 여겨지는 에러가 생겼는데도, 코딩이론이 이 에러들을 바로잡고 훌륭한 사진을 재생해냈던 것이다. 그 이후 1979년에 보이저(Voyager)가 더 발전된 코딩이론을 사용하여 목성과 토성의 컬러사진을 전송해냈고, 오늘날에는 음악 CD의 저장이나 컴퓨터 모뎀에도 코딩이론이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수학적으로 코딩이론은 유한체(finite field)상에서의 추상적 수학이론인데, 추상성이 유용성을 막는 사유가 될 수 없음을 입증한 셈이다.

인터넷이 출현한 과정을 보자. 1980년대에 스위스의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인터넷 개념이 개발된 것으로 흔히들 알려져 있는데, 이제는 인터넷을 통한 광범위한 정보교환이 일상화 되면서 삶의 방식이 바뀌고 있다. 하지만 문명사적인 사건으로까지 기억될 인터넷의 출현에도 문제가 있었다. 광섬유 등을 통한 초고속 통신이야 빠른 속도 뿐 아니라 왜곡도 잘 생기지 않지만, 잡다한 네트워크들을 묶은 인터넷은 이곳저곳에서 신호왜곡이 생기는 못 믿을 통신 채널이었던 것이다. 가벼운 글이야 몰라도 신용카드번호 같은 중요정보를 못 믿을 방식으로 전송하여 엉뚱한 번호가 전해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다행히도 수학자들이 개발해둔 코딩이론이 있었다. 인터넷에서도 신호왜곡의 걱정 없이 중요한 정보의 교환이 가능한 이론적 토대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실험실 밖으로 외출할 수 없었을 인터넷 개념은 학자들의 지극히 일상적인 학문 행위의 결과로 날개를 단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의 학문적 활동에 당대의 유용성 잣대를 함부로 적용하는 것은 무모하며 위험하다. 우리 포스텍 학생들도, 유용한 학습과 연구를 통하여 인류에게 기여한다는 뜻을 갖는 것과 함께, 호기심에 기반한 창의적 노력의 중요함과 학문적 활동이 갖는 문화적 가치를 잊지 말기를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