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랭크 인, 문화 충전소! #2 퍼포먼스
크랭크 인, 문화 충전소! #2 퍼포먼스
  • 김광철 / 광주 퍼포먼스 작가회 및 KoPAS 광주 대표
  • 승인 2003.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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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 삶에 있어서의 실현과 그 의미
▲ 퍼포먼스
세기 미술양식에 있어 모더니즘 미술이 르네상스의 환영주의에 반발, 평면화를 추구하였다면 40년대~60년대에 이르러 전면(全面)회화나 전백(全白)회화의 출현으로 모더니즘 실험양식의 상징적인 종말을 맞게 되었다.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미적 양식을 추구하는 일군의 아방가르드는 시대적으로 새로운 표현양식의 대안을 찾게 되었다. 그 중, 일군의 예술가들은 타 장르와의 적극적 교류를 통해 대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 때 나타나게 된 미술양식의 하나가 퍼포먼스 아트다.

작가의 생각이 더 중요시되는 개념주의 미술에서 파생된 퍼포먼스는 마치 화가가 붓과 물감, 그리고 캔버스를 이용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물질로써 실현화 시키듯이 물질과 그 물질의 1차적인 개념인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 정신의 시각적 상상력으로 기존의 표현형식에 의문을 제시하면서 발현된 미술 형식이다.

초기의 퍼포먼스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발현되는 반대를 위한 반대적인 개념의 다다이즘을 그 원류로 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의미, 그리고 그 반대적인 무의미를 추구했던 다다이즘은 이후 초현실주의로 이어졌다. 이후 현대적인 퍼포먼스라는 명칭은 1970년대에 하나의 독자적인 표현 매체로써 나타나게 된다. 플럭서스나, 해프닝, 이벤트라고 불리기도 하면서, 냉전시대의 월남전을 기점으로 히피, 통기타, 청바지, 락뮤직과 더불어 전세계의 문화가 다양하고 새롭게 요동치는 때에 독일에서는 백남준과 요셉보이스 등이 신체를 오브제(작품에 들어가는 물질)로 삼아 자신이 직접 하나의 작품의 요소가 되는 퍼포먼스를 시작하고, 전 세계적으로 신체를 가지고 미적 조형적인 표현을 하는 작가들이 나타난 것이다. 한국엔 이승택, 이건용, 정강자 같은 1~2세대의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이 출현하게 된다. 표현의 확장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신체를 활용한 퍼포먼스가 나타났다는 이승택 선생의 말처럼 초기의 퍼포먼스는 지금의 개념과는 다른 각도로 접근되었지만, 신체를 기반으로 생각과 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기본개념과 그리 다르지 않다.

한편, 퍼포먼스의 경향성은 많이 바뀌었다. 초기의 퍼포먼스는 관객에게 비판과 재사고를 요구하는 특징을 가졌다면 최근의 퍼포먼스는 관객이 즐기고 느낄 수 있는 형태로 점차 변화하고 있다. 퍼포먼스가 대중화되는 점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지만, 의미있는 메시지의 상실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퍼포먼스가 점차 공연화되고 쇼처럼 요소화 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흐름이면서도 염려되는 점이다.

서울에서 열린 제2회 실험예술제는 바로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한국 퍼포먼스의 흐름을 정리하고 검토하는 장이었다. 서울, 부산, 광주, 대전, 수원, 인천 등 전국의 퍼포먼스 아티스트와 아시아권, 서구권 작가들이 함께 새로운 표현의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번 실험예술제는 인터넷을 이용한 퍼포먼스와 비디오와 접합된 퍼포먼스로 새로운 매체와 결합하는 새로운 양식을 탐구하는 등 개개인의 독특하면서 독자적인 개인작가적 실험의 결정체를 볼 수 있었던 자리였다. 특히 1세대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이 이후 신세대들의 작품들과 같이 하나의 공간에서 연출되었다는 점에서 보다 큰 의미가 있었다.

퍼포먼스는 심리적, 억압적인 외적 에고로부터 인체를 바탕으로 진아(眞我)를 찾는 동시에 문화적인 대안을 찾아나간다는, 진지한 삶의 시선에 바탕을 둔다. 퍼포먼스는 개념적인 접근과 동시에 실행의 차원에서 자아를 창의적으로 표현, 또 다른 오브제를 확대 조화시킴으로써, 생활상의 많은 의미를 재조명하고 다양한 문화적 양식을 함께 공유한다.

2003년 김천시 주최 국제 퍼포먼스 페스티벌과 광주시 주최 ‘청소년을 위한 문화축제’에선 청소년을 대상으로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표현을 해보는 장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의 문화가 감상하는 차원에서 좀 더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희망찬 전조라고 생각한다.